홍대용의 우정과 ‘이성적 대화’
2019년 07월 30일(화) 04:50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연암 박지원과 함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로 분류되는 실학자이다. 그는 일찍이 우리 인류가 발을 딛고 사는 땅은 둥글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설파했고 나아가서 우주무한론을 제창하였다. 이처럼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였는데 인간과 만물과 우주를 아울러 근원적으로 사고하여, 그의 학적 사유는 자연철학의 경지에 미치고 있었다.

연암과 마찬가지로 담헌 역시 외교사절단을 따라 중국을 다녀와서 ‘담헌연기’를 저술하여 ‘열하일기’와 나란히 연행록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는 여행 중에 베이징의 유리창에서 우연히 항저우(杭州)의 세 학자를 만나 사귐이 깊어져서 친구가 되었다. 서로 주고받은 대화를 필담집으로 정리하고 내왕한 편지들에는 ‘회우록’이란 이름을 붙였다.

연암은 이 ‘회우록’의 서문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던진다. 조선의 담헌과 중국의 세 지식인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서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가? 이역만리 떨어져서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길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 조선을 돌아보면 신분 등급이 다르면 교우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당파가 다르면 서로 알고도 사귀려 들지 않는 실정이었다. 어떻게 가능했던가? 요컨대 ‘번거로운 예속을 파탈하고 까다로운 구속을 제거해서 진정을 토로하고 간담을 털어놓는’ 이런 태도야말로 인간과 인간을 격의 없이 가깝게 만드는 방도라고 말한다. 이해타산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세 친구 중에 엄성(嚴誠)은 맨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인품이 속되지 않고 지혜롭게 느껴져서 일견에 마음이 쏠렸다. 엄성은 불행히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엄성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주문조(朱文藻)라는 사람이 담헌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그 부음을 알려 왔다. 이 편지는 10년이 걸려서 담헌 손에 들어온다. 청과 조선 간에 매년 외교사절이 오고 갔음에도 인편에 전전하다 보니 그렇게 된 일이었다. 주문조는 엄성이 운명하는 장면을 눈앞에 보듯 그려 낸다. 엄성은 병이 위중해진 그날 저녁에 담헌의 편지를 읽어 달라고 청하여 듣고 눈물을 흘리며 담헌에게 선물로 받았던 먹을 꺼내 묵향을 음미하다가 숨을 거뒀다. 편지와 먹은 그의 관 속에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한다. 한중의 지식인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하고 아름다웠던가를 실감케 한다. 그것은 상호 간에 학문과 지식의 교환으로 열린 것이지만 인간 본연의 심성이 통해서 각별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담헌과 세 중국 지식인의 각별한 사귐에서 ‘이성적 대화’란 개념을 도출해 보았다. 이제 막 열린 단계였지만 동아시아의 한·중·일 3국에 학술 교류가 자못 활발해지고, 하여 실학이란 신학풍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이성적 대화를 과연 운운할 수 있을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의 동아시아의 역사는 상호 적대적이어서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음 20세기 말에 세계 냉전 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전과 다른 국면으로 진입한 것이다. 최근 한반도의 상황이 남쪽에서 ‘촛불 혁명’의 진행에 연쇄적으로 북미 관계의 움직임이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국이 한일 관계에 문제 제기를 하여 야기된 분쟁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심상치 않다. 한국인들 사이에 경제적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나는 지금 이성적 대화를 거론하는 터이기에 관련 지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아베 정권은 이 지점에서 왜 한국 때리기를 계속하며 동아시아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일까? 관점에 따라 분석들이 백출하고 있는 바, 큰 눈으로 보아 2019년의 동아시아 신국면에 대한 아베 정권의 대응 논리이다. 요는 촛불 혁명이 초래한 대세를 뒤집으려는 책략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성적 대화는 개별 인간의 주체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으로 구분 지어 말할 수 있다. 국가 이성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성 국가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우호와 평화는 가시적이진 않지만 그 방향이 정당한 진로임은 분명하다. 그 길로 매진하는 데 우리 동아시아 지성들의 국경·인종을 초월한 이성적 대화가 필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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