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삼층 석탑과 무염지(無染池) : 정교하고 단아한 석탑, 대흥사의 가장 오래된 보물
2019년 05월 15일(수) 00:00
주위 산세와 오묘한 조화 ‘삼층석탑’
통일신라때 건립… 청동불 출토 학계 관심
관음전 앞 작은 연못 ‘무염지’
맑은 마음으로 수행… 초의선사가 조성
불경 보관·연등 매달린 ‘윤장대’
팔각모형 한바퀴 돌리면 불경 모두 읽는 것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은 대흥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꼽힌다. <대흥사 제공>

해남의 바다는 승전의 바다다. 해남은 호국의 땅이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이순신은 왜군을 대파했다. 100여척의 왜선이 노도의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명량해전은 일본의 수륙병진책을 무력화한, 이순신의 지략이 빛나는 전투였다.

그 바다,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을 지난다. 5월의 바다는 잠잠하나 물결은 예사롭지 않다. 바다는 400여 년 전,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기억하고 있을 게다. 역사를 간직한 바다위로 5월의 햇살이 들이친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햇살은 그러나 청색의 수면을 뚫지 못한다.

승전의 그 밤, 충무공의 심회는 어떠했을까. 먼 바다를 굽어보며 그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역사에 진저리쳤을 것이다. 인간은 늘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자 지배의 역사다. 제국의 역사, 근대의 역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담보로 이룩한 역사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해남 울돌목을 지나며 오늘의 역사를 생각한다. 조선은 전쟁에 불비하면서도 파벌싸움으로 날을 샜다.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다가올 가혹한 운명을 알지 못했다. 충신을 왜곡하고 능멸했던 그들로 인해 조선은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모리배들의 세치 혀는 무능한 통치자의 눈과 귀를 멀게 했고 백성들을 질곡에 빠뜨렸다.

이순신의 순정한 정신이 깃든 울돌목을 지나, 5월 해남의 품에 안긴다. 이 계절 남도는 초록으로 물든다. 그러나 가슴마다 슬픔과 응어리가 가득하여 무참하고 무참하다. 5월 그날 민초들의 가슴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이들은 누구인가. 무고한 시민을 향해 발포를 명했던 그들은 여전히 역사를 능멸하고 있다. 살육의 참상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기 마련이어서, 그들의 붉은 이름을 역사의 법정은 결코 지우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 우리의 역사가 가없고 아픈 것은 은폐된 진실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은 대흥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꼽힌다. <대흥사 제공>
해남 대흥사(주지스님 월우)에도 5·18민중항쟁 사적지가 있다. 80년 당시 대흥사에는 여관이 많았다. 광주에서 내려온 5·18시민들이 숙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7~8대 차량을 타고 내려온 시민들은 광주여관, 안흥여관(지금은 없어짐), 유선여관에 머물렀다. 이후 5월 22일 광주로 향하던 시민들에게 이곳 주민들이 김밥, 음료수 등을 지원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흥사는 품이 넓은 사찰이다. 품어주고 다독여주는 절이다. 그 옛날 서산대사가 호국의 횃불을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시국이 어수선하고 동요할 때, 어떤 이들은 산중에 들러 기도를 하거나, 어떤 이들은 비책을 마련한다. 80년 군홧발에 짓밟힌 민초들은 이곳에 와 ‘미륵의 세상’을 꿈꿨다.

삼층석탑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비로소 나와 마주한다. 마주하는 나는 참 나인가,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인가. 답을 할 수 없다. 탑 저편에서 누군가 묻는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 구름 한 점 쓸쓸하다. 붉은 꽃송이만이 너울너울 손짓을 한다.

오염에 물들지 말라는 뜻을 지닌 연못 ‘무염지’.
그대는 무엇을 염원하는가. 무엇을 바라는가. 아니 무엇을 찾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사선으로 들이치는 빛이 곱다. 정교하고 단아한 석탑은 주위의 산세와 조화를 이룬다. 찰나와도 같은 생이 잠시 멈춘 느낌이다. 석탑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이편을 지그시 바라본다. 염화미소(拈華微笑). 그대는 무엇을 버렸는가.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비웠는가. 먼저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지 않고는 어떠한 진리도 찾을 수 없으리. 대덕고승들의 법어가 귓가를 물들인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리.”

탑은 비원을 기리는 곳이다. 사찰에 드는 이들은 모두 이곳에서 기원을 한다. 삼층석탑이 선 자리는 주위의 산세와 조화를 이룬다. 조금의 속기(俗氣)도 없는 영험한 처소다. 산중의 석탑은 사찰의 건물과 일정한 배치를 이룬다. 이를 가람 배치라 하는데, 대흥사는 여느 사찰과는 다른 구조다. 절을 가로질러 금당천이 흐르고, 이를 경계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의 당우가 있다. 일반적인 절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독특한 형식이다. 계율 너머의 자유를 희원하는 대흥의 대의가 깃들어 있다.

“대흥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바로 삼층석탑이지요. 통일신라시대 건립됐는데 청동불이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박충배 성보박물관장의 설명이다. 이어 “석탑은 4.3m의 크기로 주위의 가람배치와 조화를 이룬다”며 “탑신은 옥신과 옥개가 별석으로 구조화돼 있으며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추녀 아래는 직선의 형태”라고 덧붙였다.

삼층석탑 인근에는 화려한 윤장대가 있다. 팔각형 팽이 모형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어린아이처럼 팽이를 돌리고 싶어진다. 화려한 팽이는 무엇일꼬? 이어지는 박 관장의 설명.

“윤장대 내부에는 불경을 넣어 보관합니다.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지요. 중국 양나라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오는데 하나의 소원을 빌면 하나의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소원을 담은 쪽지와 등이 걸린 ‘윤장대’.
연등과 쪽지가 매달린 윤장대에서 많은 이들의 불심과 간절함이 읽힌다. 바람이 불어오자 수많은 쪽지들이 팔랑개비처럼 흔들린다. 꽃의 흔들림이다. 흔들리는 것은 비단 쪽지 뿐은 아니어서 각각의 종이마다 삶의 고단함과 무거움이 느껴진다. 함부로 연을 만들지 말아야 하리. 그러나 한번 맺은 인연은 선업이 되도록 마음을 다해야 한다.

무거운 머리를 비우기 위해 무염지(無染池)로 향한다. 그 이름과 뜻이 다함없이 좋다. 관음전 앞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오래도록 발길을 멈춘다. 대흥사 경내에는 보석 같은 공간이 많다. 무염지도 그 한 곳일 터. 이름 그대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곳’이라는 의미다. 그 앞에서 못내 부끄럽다.

“이 연못은 속세의 홍진(紅塵)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청정한 마음, 무구한 마음을 견지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사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터지만요. 이곳은 초의선사가 조성했는데 맑은 마음으로 수행을 하라는 뜻입니다.”

월우 주지스님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주지스님은 각각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마음 ‘심’(心) 자 모양으로도 보인다고 했다. 대흥사에 올 때면 무염지를 빼놓지 않고 오는 이유다. 한번에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오묘한 구조가 우리 삶의 단면 같아 늘 신비롭다.

연못에서 발을 돌려 일주문을 나선다. 무엇에 물들지 말 것인가. 하산하는 길에 되묻는다. 길은 멀고 걸음은 가볍다. 산 아래는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 천지거늘…. 물들지 말라, 물들지 말라. 돈에 물들지 마라, 욕심에 물들지 마라, 사사로움에 물들지 말라, 아니 다른 무엇보다 세상의 삿된 생각에 물들지 마라. 그리고 너 스스로에게 물들지 마라.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