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유산 대흥사] <7> 대웅보전과 현판
삼존불 미소 보고 조선 3대 명필 만나다
아미타래부처·석가모니·약사여래부처
전남 지정문화재·보물 제 1863호 지정
원교 이광사·추사 김정희·창암 이삼만
3대 명필 ‘현판’ 역사 속 인물들과 조우
2019년 04월 17일(수) 00:00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국가 지정 보물로, 독특한 가람배치는 주위의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대흥사 제공>

대흥사에 가본 적이 있는가. 진정 해남 대흥사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 품이 넓은 산사에 안긴 적이 있던가.

봄철 한낮의 햇볕은 종요롭고 눈에 닿는 모든 것은 푸르다. 계절은 생명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봄이라는 계절은 가장 아름다운 생명 가운데 하나다. 만물 소생을 도탑게 뒷받침하는 공덕이 다함없다. 우리도 이 계절에 봄이 될 필요가 있다. 봄을 맞으러 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봄이 되는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대흥사(주지 월우)에 가본 적이 없다면, 지금 가보기를. 해찰하듯 느린 걸음으로 떠나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심오한 산사에 안겨 잠시만이라도 긴 숨을 쉬어야 하리. 허물을 벗듯 근심걱정을 내려놓아야 하리. 우리는 너무도 ‘빨리’, ‘많이’라는 시스템에 얽매여 있었다. 삶이 닳아지는 모습이 보일 지경이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알지 모르고 달려왔다.

잠시 내려놓자. 잠시 숨을 돌리자. 잠시 산사에 들어서자.

대웅보전은 다포계 건축에 다양한 장식요소가 가미된 건물이다. 중정식 가람배치의 특징을 보여주며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경내에 들어서면 역사 속 인물들과 조우한다. 현판의 글씨가 바로 조선 3대 명필의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창암 이삼만(1770~1845)이 그들이다. 이들의 글씨는 ‘서예전시장’을 떠올릴 만하다. 글씨의 경쟁은 비할 데 없는 ‘아름다운’ 경쟁으로 다가온다. 글씨에서 저마다의 문기와 예술혼이 배어나온다.

그런데 잠시, 이곳 대웅전은 왜 대웅보전이라 이름할까? 일반적인 주불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한다면 대웅보전은 삼존불이 모두 모셔진 곳을 말한다.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삼존불은 본존불(本尊佛)과 좌우 보처불보살(補處佛菩薩)을 이른다.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가운데 석가모니부처와 왼쪽 아미타래부처, 오른쪽 약사여래부처가 있다. 현재 전남 지정문화재로, 삼존불은 보물(국가지정문화재) 제 1863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에는 명필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것이 1840년이었다. 제주도로 가던 중 남도의 명찰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주지는 초의선사(1786~1866). 추사는 현판을 보고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그는 초의선사에게 단독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장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를 걸라고. 당대 최고의 명필로 자부하던 그는 자신의 글씨를 대흥사에 걸고 싶었다. 자신이 추구하던 서예의 세계에 원교의 글씨가 못 미친다고 여겼을 것도 같다.

그러나, 8년여의 시간은 추사에게 겸손과 겸허를 깨닫게 했다. 유배를 마치고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추사가 넌시지 물었다. “지금도 현판이 그대로 걸려 있는가?”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원래대로 원교의 글씨를 걸라 했다. 대신에 그는 다른 글씨를 써준다. 대웅전 우측의 백설당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글씨가 그의 것이다.

고난과 고통은 인간을 낮추게 한다. 하심을 배운다. 만약 추사가 유배의 고행을 겪지 않았다면 지나친 자부심은 자신을 베는 ‘칼’이 됐을지 모른다. 편액에서 편안함이 배어나온다. 고난을 통과한 이가 터득한 지혜다. 겸손의 미덕이다. 멋스럽고 담대하다. 획이 주는 운치는 그렇게 모든 것을 포용한다.

고개를 들어 대웅보전 현판을 본다. 원교의 글씨는 시원스러운 맛이 있다. 얼핏 경쾌한 느낌마저 든다. 다소 약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사람으로 치면 근기나 담대함이 부족해 보인다.

대흥사에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도 있다. 가허루(駕虛褸). 비운의 명필 창암의 글씨다. 창암은 조선 후기 서민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생계가 곤궁해 글씨를 쓸 종이가 없었다 하니, 예술의 열망은 가없을 터다. 단정한 글씨는 조금의 걸림이 없다. 가난을 이겨낸, 물질의 유혹을 떨친 이가 도달한 궁극의 경지다.

가허루는 대흥사 남원의 출입문이다. ‘허공을 달리는 수레’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걸림이 없다. 모든 얽매임을 내려놓는 거다. 그러나 그 내려놓음이 얽매임이 되서는 안 된다.

박충배 성보박물관장은 “대흥사는 현판으로도 상당히 유명한 사찰이다”며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 등의 현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문화적·예술적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대웅보전을 둘러 보고 경내를 돌아본다. 대흥사는 넓다. 깊다. 한달음에 걸을 수 없다. 품이 넓은 대흥사에 가려거든 족히 2~3일은 짬을 내야 한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바라보자. 오랜 눈맞춤으로 들여다보자. 무념을 득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내려놓음이다.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별원은 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을 일컫는다. 대흥사의 가람배치는 여느 사찰의 그것과는 다르다.

대웅보전 석가여래3불좌상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에 자리 잡은 대흥사는 특이한 가람배치를 지닌다.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 달리 일정한 가람배치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한 독특한 공간구성을 지닌다.” (세계산사유산등재추진위원회,『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학술총서-무형유산Ⅱ』, 2017)

대흥사의 역사와 당우, 불구(佛具) 또한 그러한 지리적 영향과 무관치 않을 터이다. 수많은 문화재와 수행의 산물인 무형의 문화는 독특한 공간 구성에서 비롯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대흥사 건물과 배치를 더듬어 보자. 『한국의 산지 승원 학술총서-무형유산Ⅱ』에 나오는 설명은 이렇다.

“해탈문의 위치로 볼 때 대흥사의 중심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북원은 불보살의 구역으로 대웅보전, 웅진당 및 산신각, 명부전이 배치돼 있다. 수행자구역으로 대향각과 잭설당이 정중의 동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행당·신해당·청운당이 그 뒤편에 자리한다. 대웅보전을 마주하고 있는 침계류에는 정문이자 2층에 사물(四物)을 안치하고 있다.”

남원으로도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천불전을 위시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정묵당, 정진당, 백설당, 심검강 등이 그것이다. 이곳 인근에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동국선원내에 대광명전 구역이 자리한다.

경내를 일별하고 나온다. 봉우리에 둘러싸인 대흥사는 아늑하다. 구릉이 감싸주는 맛이 그만이다. 산간을 흐르는 계곡이 대흥사를 지나 아래로 흐른다. 알려진 대로 사찰 주위로 8개의 봉우리가 키를 맞춘 듯 사방을 에워싼다. 봉고동일성(峰高同一性)이다. 향로봉, 도솔봉, 혈망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연화봉. 우의 좋은 벗 같다. 벗들이 있는 봄이 좋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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