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유선관과 피안교 : 묵향 그윽한 100년 한옥 … 눈에 닿는 풍경마다 고적의 美
2019년 02월 20일(수) 00:00
‘ㅁ 자’ 형태 가옥 가운데에 정원 ‘서편제’ 등 10여편 영화 촬영 툇마루·장독대…고택의 멋 물씬
피안교 지나 대흥사 일주문 일상의 번뇌 잊고 산사 정취 흠뻑

대흥사 유선관은 100년 전통의 한옥으로 곳곳에는 묵향의 그윽한 향기와 불심의 서기가 서려 있다. 이곳에선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등 다수의 영화가 촬영됐다. <대흥사 제공>

땅끝에 들러 전망대에 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다도해의 풍경은 그림 같다. 아니 그림 같다는 표현으로는 아우를 수 없다. 맑은 햇살 너머 정밀한 바다와 어깨를 걸 듯 조화를 이룬 섬들은 절경 그 자체다.

해남 곳곳에는 수려한 풍경이 자리한다. 다른 무엇보다 땅끝의 바다를 보노라면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너무 맑고 푸르러 그 비경 앞에서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진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두륜산의 여맥이 주체하지 못하여 날카로운 톱니처럼 산등성이를 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선 곳이 ‘땅끝’”이라고 감탄했다.

극미(極美)의 순간이다. 이곳은 세상과 가장 가까이 이웃하면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천혜의 바다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 보길도와 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도 오래 만난 벗처럼 정겹다.

겨울의 끝자락, 타박타박 땅끝을 찾아 모처럼 여유를 찾는다. 남도를 알려거든, 아니 해남을 알려거든 땅 끝에 가보라. 일렁이는 파도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면 왜 눈물겹도록 삶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이곳에서 시작과 끝을 논하는 건 무지의 소치일지 모른다.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가까이 누워 있는 저 바다는 “그래, 그래, 수고했다”며 어깨를 다독인다.

시나브로 겨울이 가고 있다. 막 당도한 버스가 스치듯 그렇게 말이다. 계절은 늘 그런 것이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서는 아낙의 섬섬옥수를 뿌리치는 매정한 사내와 같다.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는 소월의 시가 이즈음에 연상되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다.

겨울 대흥사의 피안교. 아치형의 다리 위로 나뭇잎을 떨군 나무의 모습이 이채롭다.


땅끝에서 나와 오래도록 눈에 품었던 그곳으로 간다. 바다를 보았으니 산세의 아늑함에 묻히고 싶다. 해경(海景)에서 산경(山景)으로 들어서는 이유다. 해남의 천지 어디에나 아름다운 ‘경’(景)을 첨언해도 어색하지 않다.

대흥사 매표소를 지나 한참을 들어가자 유선관(遊仙館)이 나온다. 유선관(遊仙館). 절에 들를 때면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다. 산사에 여관이 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세상 어느 곳인들 유숙할 거처가 아니며 누구인들 나그네가 아니겠는가. 마음의 때을 씻어줄 산사에서 하루를 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흥’(大興)과 ‘유선’(遊仙), 크게 흥하는 곳과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의미가 자못 특이하다. 상이한 듯 하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흥’과 ‘신선’이 심연의 기저에선 상통되기 때문이 아닐지.

유선관 밖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삶은 그렇게 늘 어딘가로 들어서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문은 열려 있으나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세상 모든 나그네의 심사가 그러할 것은 아닌지. 지나온 저잣거리의 발걸음이 무겁고 아득하다. 발에 묻은 흙먼지라도 털어야 할 것 같다. 한참을 문밖에서 가만히 소리를 듣는다.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뱁이여”

어디선가 가슴을 저미는 소리 한가락이 들려온다. 환청이다. 바람이 물고 온 소리는 아프게 가슴을 때린다. 이곳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 촬영지다. ‘천년학’ 등 10여 편의 영화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영화사에 빛나는 작품들이 유선관(遊仙館)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처연한 감동을 주는 예술 작품일수록 그곳의 배경은 아름답다. 슬픔의 미학은 아름다운 곳에서 빛을 발하나 보다.

못내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선다.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이곳은 100년 전통의 남도의 한옥이다. 대흥사를 찾는 수도승이나 신도들의 객사로 쓰였다. 그러다 여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안팎이다. 특히 TV프로 ‘1박2일’에 소개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늘었다. 이곳에 오는 이들은 무릇 하루나마 신선이 되고 싶은 것이다.

가운데 정원을 두고 ‘ㅁ 자’ 형태로 가옥이 빙 둘러 있다. 부드러운 곡선과 묵향의 온기가 지친 객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잠시 툇마루에 걸터 앉아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눈에 닿는 풍경마다 불심의 서기가 느껴지고 고적의 미가 밀려온다. 눈을 들어 겨울산을 바라본다. 하늘을 인 봉우리마다 천년 고찰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 아니 무엇을 바라는가.

이곳은 대흥사에서 일반인에게 대여를 해 관리한다고 한다. 2~3인실, 4~5인실, 8~10인실 의 전통 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안에는 병풍과 동양화가 있어 한옥의 깊은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장독대 뒤편에 참새인지 산새인지 모를 새들이 앉아 재잘거린다. 담장 너머 첩첩산중을 날아와 새들은 노래를 부른다. 녀석들은 그렇게 속세와 선계 사이에 앉아 있다. 어쩌면 새를 바라보는 이편이 선계일 지도 모르겠다. 무릉도원의 품에서 새들은 자유롭다.

유선관에 들어와 앉으니 세상의 소리가 걸러진다.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고,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이 산사의 오묘한 진리! 이곳에서 한동안 산 아래 모든 생각을 닫아둔다.

그리고, 얼마 후 피안교를 넘어 대흥사로 향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의 글귀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나 이곳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니던가.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세상의 모든 삿된 생각을 버려라.’ 생각이 생각을 낳고, 번뇌가 번뇌를 낳는, 그 고통의 집착을 잠시 끊는다.

겨울의 한날, 그렇게 대흥사 경내에 들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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