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김인후와 유희춘의 스승 최산두
2019년 02월 18일(월) 00:00
호남의 유학에 관심을 갖고 당시의 유학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들을 살펴보면, 15세기에 호남에서 큰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사실을 알게 된다.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한 연촌 최덕지(1384∼1455)와 태인으로 은퇴했던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이 선구적인 학문 활동을 하였고, 그 뒤를 이어 나주 출신이지만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강학을 했던 금남 최부(1454∼1504)가 학파를 이룩한 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부와 동년배이지만 16세기 중엽까지 생존했던 지지당 송흠(1459∼1547)은 15∼16세기를 관통하는 학자로 그 문하에서 학포 양팽손, 면앙정 송순 등이 배출되어 16세기에 만개하는 호남 유학의 터전을 굳게 다져 주었다. 송흠의 뒤를 이어서는 눌재 박상(朴祥:1474∼1530)과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가 나와 호남 유학의 큰 학맥이 형성되었다.

최산두는 광양 출신이다.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로 사인(舍人)이라는 참으로 명예로운 직책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동복(지금의 화순)으로 귀양 와 14년을 지내며 크게 학풍을 진작시켰다. 또한 그의 문하에서 조선 최고 수준의 학자였던 하서 김인후(1510∼1560)와 미암 유희춘(1513∼1577)이라는 16세기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최산두는 젊은 시절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등을 사숙하여 학문을 익혔다. 14년의 귀양살이 이후 유배가 풀려 벼슬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제자들의 양성에 생애를 바치는 학자로 생을 마쳤다.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다 탄압을 받은 의인들을 기묘명현이라 부르는데 당시 호남에는 대표적인 기묘사화 피해자가 있었으니 유희춘의 형인 유성춘, 윤선도의 선조인 윤구와 최산두가 그들이다. 이들은 문장과 학문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절의와 지조에 철저한 의리파여서 세상에서는 이 세 분을 ‘호남 3걸’이라는 아름다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최산두는 벼슬하느라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했으니 조광조·김정·김구·김식·박상·기준·김안국·김정국 등 쟁쟁한 학자들과 어울리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세도의 변화에도 노력했다. 하지만 간신배들이 일으킨 사화에 걸려 은둔의 생활을 해야만 했으니, 의리를 지키다 보면 피해만 보는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의인들을 불우하게 만들고 말았다.

최산두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 김인후는 스승의 학덕(學德)을 극도로 칭송한 제문(祭文)을 바쳐 애도의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하였고 미암 유희춘 또한 뒷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을 지어 뛰어난 인품과 학문의 깊이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뜻을 표현하였다. 16세기 호남의 대표적 학자는 하서와 미암, 일재 이항, 고봉 기대승, 사암 박순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들 중에서 두 분이 최산두의 제자라면 최산두의 학문 경지가 어디쯤에 이르렀는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스승을 보면 제자를 알 수 있고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최산두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일화 하나가 있다. 15세에 ‘통감강목’이라는 책 80권을 지니고 석굴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 번을 읽어 완전히 외우고 나오니,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는 이야기다. 그만한 천재에 그처럼 골똘하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만한 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세상을 떠난 뒤 유문을 제대로 모으고 간행하는 일이 잘못되어 대부분의 유문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문집이 제대로 간행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수백 년 뒤에야 후손들의 노력으로 문집이 나왔으나 너무 빈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최산두의 높은 학덕은 잊히지 않아 화순과 고향 광양에는 그분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이 세워져 그만한 학자의 뒤를 덜 쓸쓸하게 하고 있으니 그것만이라도 다행한 일이다. 화순에는 도원서원(道源書院)이 있고, 광양에는 봉양사(鳳陽祠)라는 사당이 있어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인후와 유희춘을 가르친 스승인데, 기묘사화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은둔으로 일생을 마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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