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한국영화 100년] <2> 항일정신 아로새긴 무성영화 걸작 ‘아리랑’
연극+영화 '의리적 구토' 후 무성영화시대 진입
전 스태프 한국인으로 구성 김영환 '장화홍련전'
2019년 01월 16일(수) 00:00

1920~30년대에는 항일정신을 담은 걸작 ‘아리랑’ 등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들이 제작됐다. 영화 ‘아리랑’ 촬영 현장, 감독과 배우로 활동한 나운규, 영화 ‘아리랑’의 한장면,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

‘아리랑’ 등이 담긴 2007년 발행 한국영화 우표 시리즈.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1분미만의 활동사진이 공개된 후, 활동사진은 급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국에도 활동사진이 도착한 것은 당연했다. 서양의 선교사와 일본인 상인들이 전파한 활동사진은, 이를 관람한 관객들에게 충격과 경이로움을 선사했던 것이다.

초창기 영화를 둘러 싼 일화는 당시의 신문광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의 광고에는 동대문의 한성 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리고 이때 소개된 활동사진은 서양 여러 나라의 풍경과 일상을 찍은 기록필름이었다. 그렇게 초창기의 영화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극영화의 내러티브 관습이 구축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초창기 한국영화의 상황은 영화를 제작할 만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서양의 작품들을 수입해 상영했다. 한국의 관객들은 1919년이 될 때까지 서양에서 만든 영화를 관람하며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19년 10월 27일은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날이다. 이 날은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상영된 날로 한국영화의 탄생일로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리적 구토’는 영화로서는 불완전한 연쇄극이었다. 연쇄극은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무대극의 일종으로 야외장면을 촬영해 연극 무대가 진행되는 중에 상영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연극의 중간에 막이 내려오고 그 막에 애초에 촬영한 장면이 펼쳐졌다가 화면이 끝나면 막이 올라가고 다시 연극이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의리적 구토’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몇 편의 연쇄극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한국영화는 무성영화시대로 접어든다.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1923)는 최초의 극영화로 평가받는데, 일본인에 의해 촬영, 편집되었고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출연했다. 김도산이 감독과 주연을 겸한 ‘국경’(1923)은 한국 최초의 활극영화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가 만든 ‘춘향전’(1923)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일본인이 영화계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나온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은 전 스탭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기술적인 완성도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 점에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내용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한 차원 다른 영화였다. 일제강점기의 억눌린 민중의 감정을 리얼하게 표출해 낸 저항의식을 담아낸 것도 그렇고, 몽타주를 시도하는 등 영화언어에서도 혁신적인 영화였다. ‘아리랑’은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워 일제의 검열을 피해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1926년부터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시행했는데, 경찰의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는 아예 상영할 수 없었고, 검열한 뒤에도 ‘공안, 풍속, 보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상영을 못하게 하거나 필름을 삭제할 수 있었다. 이에 나운규는 제작자와 각본가를 일본인의 명의로 신고해 일본의 검열을 피해갔던 것이다.

‘아리랑’은 영화로서도 뛰어난 걸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저항정신을 필름에 아로새긴 민족영화였다. 나운규는 당시의 번안모작물이나 신파영화와는 달리 농촌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내며 진실성을 높였다. 또한, 나운규는 본인이 연기한 주인공 영진을 3·1운동 때 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인물로 설정했고, 그가 미워해 죽이게 되는 기호는 일제에 아첨하는 반민족적인 인물로 설정했다. 나운규는 일제 편에 선 반민족적인 인물을 응징하는 이야기를 펼쳐내며 당시 나라를 빼앗긴 민중들의 울분을 대변했던 것이다.

‘아리랑’이 성공한 후 나운규는 ‘풍운아’(1926)를 연출했고,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여 1928년 ‘옥녀’,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 등의 영화를 내놓았다.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을 연출했다.

나운규는 1936년 ‘아리랑 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했고, 1937년에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흥행과 비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그해 8월 9일 35세로 요절했다. 나운규는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무려 15편이나 된다. 그의 작품 목록이 한국영화의 성장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시기 빼놓을 수 없는 영화 동향 중 하나는 카프(KAPF)의 영화 운동이다. 1927년 3월에 발족한 조선영화예술협회는 이경손, 이우, 김을한, 안종화 등이 발기인으로 나섰고, 연구생제도를 두어 신인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때 연구생으로 김유영, 서광제, 임화 등이 영화 수업을 받았다. 이후 카프 영화부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유랑’(1928, 김유영), ‘혼’가(1928, 김유영), ‘암로’(1929, 강호), ‘화륜’(1931, 김유영), ‘지하촌’(1931, 강호)등이다. 카프 영화인들은 지주와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냈고, 당시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핍박한 생활을 영화로 표현했다.

1932년 9월 1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아리랑’과 더불어 한국 무성영화 시대에 쌍벽을 이루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에 나운규는 주인공인 수삼을 연기했다. 그가 대본만 보고 머리를 삭발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뱃사공 수삼과 그의 딸의 비극적 삶을 그려낸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치하에서 핍박받는 조선 민족의 울분을 뱃사공과 일본인 토목기사를 내세워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검열에서 일부를 제하고 잘려 나갔지만 주인공이 도끼로 철교를 부수는 장면과 수삼의 강렬한 절규는 일제침략에 대한 우리의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대변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규환 감독은 한국영화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 마다 전환점을 마련한 감독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시기 친일영화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징용으로 끌려가는 것을 선택해 지조를 지켰고, 이후 내놓은 ‘똘똘이의 모험’(1946)으로 하루 최다 관객동원(1만 명)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끌게 된 중요한 영화 중 한 편인 ‘춘향전’(1955)을 만들기도 했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