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주년과 광주의 시대 정신
2018년 10월 30일(화) 00:00

[문기전 광주YMCA 사무총장]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이 날은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이 일제의 만행과 울분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 일제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날이다.

2019년 기미년 3월 1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3·1 독립 만세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 민족은, 그리고 광주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무엇으로부터 어떤 독립을 이뤘고 100년 이후에는 어떤 광주가 돼야 할까라는 물음을 3·1 운동의 좌절로부터 태어나 역시 2020년 창립 100년이 되는 광주YMCA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묻고 또 묻게 된다.

광주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동해 일어났다.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김필수 목사가 광주에 내려와 독립운동가이자 3·1 운동 실패 후 광주YMCA를 창립하게 될 최흥종과 광주YMCA 초대 사무총장을 맡게 될 나주 출신 독립운동가 김철을 만나게 된다. 광주 거사는 큰 장날인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로 하기로 하고 최흥종과 김철은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열릴 예정인 3·1 만세 운동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간다. 그날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질 때 당시 인력거에 타고서 이를 지켜보던 최흥종은 감격적인 분위기에 참을 수 없어 인력거 안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그만 종로 경찰서에 연행돼 구속되고 만다.

결국 광주에서 거사는 김철 혼자 맡게 됐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 3월 10일 오후 3시 양림동에서는 교인들과 숭일·수피아 두 학교 학생들이 내려오고 일반 시민들은 서문통으로, 농업학교와 시민들은 북문통을 거쳐 삽시간에 1000여 명의 인파가 장터에 모여들게 됐다. 이때 참여했던 주동자의 상당수가 뒤에 광주YMCA 활동의 주역이 된다.

광주YMCA는 3·1 운동의 실패와 좌절로 당시 광주에서 독립운동의 주동자였던 최흥종 목사를 비롯 숭일학교 교사와 광주 지역 청년들이 참여해 1920년 7월 28일 지금의 양림교회 옆에 있는 오웬 기념관에서 창립을 하게 됐다.

이제 역사의 물줄기는 도도히 흘러 그날로부터 100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승만 독재에 항거해 일어난 4·19 학생 혁명, 유신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 끝에 일어난 부마 민주 항쟁,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2016년 촛불 혁명으로 이어지기까지 대한민국 질곡의 역사에서 3·1 만세 운동은 그 첫 시작점이 아닐까 한다.

불의한 독재에 항거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3·1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광주는 이제 3·1 운동 100년을 앞두고 다시 한번 당시의 핵심 가치를, 지금의 시대 정신을 반영해 새로운 비전 선포와 함께 독립 선언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됐다.

광주는 3·1 운동의 정신이랄 수 있는 ‘자주 독립’, ‘민족 통합’을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 통일로 ‘주권재민’을 광장 민주주의, 제도적 민주화를 넘어선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힘으로, ‘정의·인도’,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사회 공공성 회복으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이야말로 3·1 정신의 재현이자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우리 민족의 과제이다. 주권재민의 원칙에 입각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의제를 개발하고 정의·인도주의 원칙에 입각한 생명 평화의 지구촌 공동체를 향한 비전 선포가 곧 3·1 정신을 계승하는 100주년 이후 광주의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3·1 운동 주역이었던 우리 시민들의 뜻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의 후손들을 찾고 발굴해 그들과 손을 잡고 3·1 운동 100주년 이후 광주 정신에 기반해 민족 통일과 지구촌 평화를 위한 비전 선포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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