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어드리프트’ ‘서치’ 와 ‘독전’
2018년 09월 18일(화) 00:00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 지금 한글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한글을 통하여 서로 의사를 소통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외계어(外界語) 같은 인터넷 언어는 접어 두고라도, 분명히 한글로 표기되어 있지만 도저히 의사소통이 안 되는 말과 글이 많다.

영화 제목에서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보자. ‘어드리프트’ ‘서치’ ‘배틀쉽’ 등은 국내에서 개봉된 외국 영화의 제목인데 영화의 원제목(‘adrift’ ‘searching’ ‘battle ship’)을 영어 발음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이중 ‘서치’는 원어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지만) 이를 보고 그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왜 ‘표류’, ‘수색’, ‘전함(戰艦)’으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거꾸로 가정해서 ‘봄날’이란 제목의 우리나라 영화가 있다고 치자. 이 영화를 미국에서 상영할 때 ‘spring day’로 표기하지 않고 ‘bomnal’로 표기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poetry’가 아닌 ‘si’란 제목으로 상영하는 데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뜻을 알 수 없는 영화 제목들

우리는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그 영화의 얼굴이다. 적어도 제목은 영화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거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영화 제목을 ‘원스어폰어타임인베니스’ 따위로 다는 것은 영화를 보려는 관객을 우롱하는 짓이고 나아가 한글을 파괴하고 학대하는 행위이다. 영어 원문을 병기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냥 한글로만 표기한 경우가 많다. 앞의 영화 제목도 ‘once upon a time in Venice’란 영어 표기는 광고판에 없었다. ‘원스어폰어타임인베니스’란 제목을 보고 이 영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베니스에서’ 또는 ‘그 옛날 베니스에서’ 정도의 제목을 붙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이다. 시내버스 외벽에 ‘독전’이란 영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일까? 독화살(毒箭)일까, 아니면 전쟁을 독려하다(督戰)일까…. 분명히 한글로 쓰여 있었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독전’의 한자를 병기했으면 짐작할 수 있을 터인데 한자도 없다. 나중에 겨우 독한 전쟁(毒戰)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화사에서 ‘독한 전쟁’ 또는 ‘지독한 전쟁’이라 하지 않고 ‘독전’이라 했을 때에는 반드시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 물론 한글 전용 주의자들은 이 경우에도 한자 병기를 반대할 것이다. 한글 전용 주의자들에게 묻는다. “과연 이런 경우에도 한글로만 표기하는 것이 옳은가?”

지역의 유래 담고 있는 지명

인명이나 지명의 경우에도 그렇다. 나는 지하철 5호선을 주로 이용하는데 역 이름을 유심히 본다. 다행히 지하철에는 역명에 한자 표기가 있어서 지명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오목교’(梧木橋)역을 지날 때는 이곳에 오동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거나 오동나무가 많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고, ‘마곡’(麻谷)역에서는 옛날 여기에 삼나무가 많아서 한때는 ‘삼골’로 불렸으리라 생각했다. 한자 표기가 없으면 ‘오목교’를 ‘오목한 모양의 다리’로, ‘마곡’을 ‘악마의 계곡’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명을 ‘참새길’이나 ‘돌길’ 등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래가 있다. 우리는 그 유래를 알 권리가 있다. 지방 국도를 지나다 보면 이정표의 지명 표기가 한글로만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지명의 유래를 알고 싶은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최근 불교 중앙종회에서 학력 위조, 사유 재산 은닉 등의 혐의로 탄핵당한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의 경우에도 ‘설정’의 한자가 병기되어야 한다. 일반인의 이름도 그렇지만 특히 스님들의 법명에는 깊은 뜻이 있다. 왜 법명을 ‘설정’으로 했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권리가 있다. 그냥 한글 ‘설정’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거룩한 한글을 우리 국민이 사랑해야만 한다. 시내버스에는 ‘숙박에서 엑티비티까지’라는 광고문이 붙어 있고, 어느 지상파 TV 방송국에서는 ‘마이 리틀 뉴스데스크’, ‘오늘의 가장 핫한 뉴스’란 제목의 방송이 나가고 있는데 한글로만 표기했다고 해서 이것을 한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한글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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