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후식 칼럼] ‘킬링 필드’에 스미는 광주 정신
2018년 08월 01일(수) 00:00
인도차이나의 젖줄 메콩강이 관통하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Phnom Penh). 이곳에서 바다 같은 호수 톤레샤프(Tonle Sap)를 따라 북서쪽으로 400km를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사원 앙코르 와트(Angkor Wat)에 이르기까지. 거리 곳곳에는 새하얀 꽃들이 곱고도 처연하게 피어 있다. 현지인들은 이 꽃들을 ‘프까 쩜빠이’라고 부르며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 준다고 믿는다.

앙코르 와트가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보여 주는 캄보디아의 볕받이(양지)라면 킬링 필드(Killing Fields)는 그늘이자 눈물이다. 1975년부터 4년간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 루주가 갓난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양민 200만 명을 무차별 학살한 비극의 현장이다. 당시 인구의 4분의 1이 이유도 모른 채 살육당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광기의 역사’를 보여 주는 학살 현장은 전국에 800여 곳이나 된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진상 규명이나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굴곡진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33년째 권좌를 지키고 있는 훈센 총리를 포함해 크메르 루즈 정권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여태껏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훈센은 제1 야당을 강제 해산하고도 엊그제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했다. 성격과 양상은 다르지만 여전히 진실이 조작과 왜곡의 벽에 갇혀 있는 5·18 민주화운동을 떠올리면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아픈 역사를 웅변하는 듯 대지의 대부분이 황토이고 강물과 호수도 붉은 빛인 캄보디아의 상처 받은 주민들을 어루만지며 희망을 심는 사람들이 있다. 프놈펜에서 66㎞ 떨어진 캄퐁스페우(Kampong Speu) 주(州)에 위치한 캄보디아 광주진료소가 치유의 베이스캠프다.

광주진료소는 지난 2014년 이주 여성 지원 단체인 (사)아시아희망나무(이사장 서정성·대표 정승욱)와 광주시, 광주시의회, 광주 의약 5단체의 지원으로 설립됐다. 광주일보도 구상 단계부터 성금 모금, 봉사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힘을 보탰다. 300여 평의 부지에 80평 규모의 단층 건물로 네 개의 진료실과 엑스레이(X-ray) 촬영실, 수술실, 회복실, 약국을 갖추고 상주 의료진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 지난달 20일부터 이틀간 개원 4주년 맞이 봉사 활동이 펼쳐졌다. 희망나무가 주관한 행사에는 52명의 광주 지역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무더위에도 아침 일찍부터 수백 명의 주민이 찾아와 그늘막 아래서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영아부터 학생이나 노인에 이르기까지 대기 행렬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다. 가장 수요가 많은 것은 안과와 치과였다. 안과의 경우 안경을 만들어 주는 장비까지 갖춰 호응이 뜨거웠다. 즉석에서 시력을 되찾아 주니 개안이나 다름없다. 진료소까지 올 수 없는 주민들을 위해 오지 마을까지 찾아가는 이동 진료도 병행했다. 한국에서 가져간 옷과 신발, 비타민과 구충제 등을 나눠 주기도 했다. 치료를 마친 주민들은 ‘어꾼 쯔란’(너무 고마워요)을 연발했다.

진료소 밖에서는 김종경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와 희망나무 이사들, 가족과 함께 봉사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빛바랜 건물을 도색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광주대 사회복지전문 대학원생 8명은 현지 초등학생들과 종이 접기, 그림 그리기를 함께 하며 문화 나눔을 펼쳤다. 진료가 끝난 뒤에는 방역과 청소까지 말끔하게 마쳤다.

놀라운 것은 저마다 자비를 들여 참가한 자원봉사자들의 태도였다. 서 이사장과 전성현 아이퍼스트 아동병원장, 박석인 미르치과 원장, 광주진료소장인 임동훈 조선대병원 교수, 김상훈 광주병원장, 한승표 우리아동소아과 원장, 조선대 치과병원 의료팀, 세한대 간호학과 학생 등 의료진은 종일 밀려드는 700여 명의 환자들을 맞아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면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번 의료 봉사는 서른다섯 번째다. 개원 이래 4년간 매년 여덟 차례 이상 찾은 것이다. JB금융그룹과 남도학숙, 조선대병원, 광주일보 리더스 아카데미, 청소년 등의 단체 봉사도 줄을 잇고 있다. 개원 초기 현지 주민들이 품었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이들의 진정성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5만여 명이 진료를 받았고, 덕분에 개원 당시 2%에 그쳤던 지역 주민의 의료 혜택률이 25%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희망나무는 광주진료소 인근에 문화센터와 게스트하우스 기공식도 가졌다. 올 하반기 완공 예정인 문화센터에는 한글 교실 등 다양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콘텐츠를 구축해 ‘한류’의 보금자리로 삼을 작정이다.

광주 의료진들이 5·18 ‘광주 정신’을 알리는 해외 인술 나눔에 체계적으로 나선 것은 올해로 10년쯤 된다. 지난 2008년 창립된 희망나무가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광주국제협력단, 세상을 이어가는 끈, (사)선한영향력, 선한의료인들,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등의 기관·단체가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네팔, 키르키즈스탄, 북한 등지에서 봉사를 펼쳐 왔다. 태풍과 지진 등 대형 재난 때는 긴급 구호 팀도 파견했다.

광주시의 지원으로 지난해에는 네팔에 두 번째 광주진료소가, 올 3월엔 몽골에 이동 광주진료소가 개설돼 의료 환경이 열악한 현지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의료진들은 나눔과 연대, 인권과 평화의 광주 정신을 지구촌 곳곳에 심고 있다. 5·18 세계화에 밀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킬링 필드에 개설된 광주진료소가 현지 주민들의 ‘힐링 캠프’로 자리 잡은 것처럼, 남북 관계 개선으로 한동안 중단됐던 대북 의료 지원이 재개돼 ‘광주 인술’이 남북 화해 협력에도 기여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who@kwangju.co.kr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