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5·18 ① 프롤로그 계엄군, 광주일보 사옥에 21·27일 무차별 헬기사격
2018년 04월 20일(금) 00:00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옛 전남도청 일대 상공에서 선회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발포명령자=특별법 제3조(진상규명의 범위) 2항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시민들에 대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책임자 및 경위, 계엄군의 헬기사격에 대한 경위와 사격명령자 및 시민 피해자 현황’을 조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부 지역 5·18연구자들은 발포명령을 5·18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고 있다.

5·18 당시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19일 오후 4시50분 광주시 동구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일어났다. 계엄군은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포위되자 총을 쏴 김영찬(당시 조대부고생) 군이 총상을 입었고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첫 집단발포는 하루 뒤인 5월20일 밤 11시께 광주역 앞에서 자행됐다. 제3공수여단은 시위대 차량에 의해 부대원이 사망하자 일제히 사격, 광주시민 2명이 사망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순용 전 3공수여단 11대대 지역대장은 지난해 11월 광주일보와 인터뷰에서 “대대장 운전병이 몸으로 시위대 차량을 막아서다 치였다”고 기억했다.

이튿날인 5월21일 오후 1시 옛 전남도청 앞에서는 계엄군이 애국가 소리와 함께 엎드려 쏴, 무릎 쏴 자세로 집단발포, 시민 수십명이 숨지거나 크게 다쳤다.

신군부는 현재까지 발포명령은 있지도 않았고 5월21일 오후 1시 이전에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쏴서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표한 ‘5·18보고서’에 따르면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시점은 5월21일 오후 1시30분 나주경찰서 남평지서에서 일어났다. 계엄군의 옛 도청 앞 발포 이후 시민들의 무장이 이뤄진 것이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5·18 한달 전에 일어난 ‘사북사건’(1980년 4월23일)의 경우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 총기 사용을 하도록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5·18 때 계엄군의 실탄 분배와 발포는 계엄사 당국의 암묵적 지원 아래 행해졌다고 추정했다.

◇암매장=5·18행방불명자들의 소재 파악은 행불자 유가족이 5·18 진상규명에서 가장 먼저 바라는 부분이다.

광주시에 따르면 5·18 행불자로 신고된 사람은 총 242명으로 이중 행적이 뚜렷한 82명만 행불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시는 전남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 용역을 맡겨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행불자 124명의 가족, 299명의 혈액을 확보했다. 오는 5월말까지 5번째로 유가족 DNA 확보를 위한 혈액 채취 신청 접수를 받는다.

5·18기념재단은 지난해 11월부터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부지, 옛 너릿재터널 인근, 서구 치평동 옛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인근에서 암매장 조사를 진행했지만 기대와 달리 특별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현재 재단의 암매장 조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오는 9월 특별법에 의해 꾸려지는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범위에 암매장이 들어있는 만큼 독자적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재단은 그동안 접수된 제보와 자료 등을 조사위에 전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재단은 여전히 암매장 당사자들의 증언을 기다리고 있다.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암매장 사실을 털어놓은 신순용 전 소령 등 5·18 당시 옛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여단 소속 군인들의 조사 참여는 큰 힘이 됐다. 유가족들은 5·18 때 사라진 시신의 행방을 알고 있는 계엄군은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일부 5월 단체 관계자들은 1980년 당시 광주천변에 거주하던 노숙자 등이 모두 사라진 점을 들어 실제 행불자는 9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료 은폐·왜곡=지난 2월 활동을 마친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보고서에서는 당초 규명 대상이었던 헬기사격·전투폭격 의혹 부분보다 5·18 관련 자료 은폐·왜곡 부분이 더 조명받았다. 특히 서주석 국방부차관이 왜곡조직이었던 ‘511연구위원회’에 참여한 이력이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면밀히 진행돼야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왜곡 주체는 크게 1985년 전두환 정권이 만든 ‘80위원회’와 노태우 정권 시절 꾸려진 ‘511연구위원회’다.

‘80위원회’의 목표는 모든 5·18 자료를 모아 ‘광주사태 백서’를 발간하는 것이고, ‘511연구위원회’ 등은 5·18 군 관련 일지·쟁점사항 정리, 국방부 기본 입장 정리, 국정조사 대응책 검토 등이 임무였다.

이들 조직이 만든 허위 논리는 현재까지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데 사용되며 5월 단체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극우 보수논객 지만원(76)씨는 지난 2015년 6월 13일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5·18 당시 계엄군에 체포된 광주 시민들의 사진을 올린 뒤 “체포되는 자들은 광주 시민들이 아니고 대부분이 북한 특수군 일원인 것으로 보였다”고 주장하는 등 북한군 5·18 개입설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도 회고록에서 북한군 투입설을 사실인 것처럼 담아 법원으로부터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 명령을 받았다.

오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 유족이 제기한 전두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진행된데 이어 27일에는 전두환 회고록 수정본 배포 금지 가처분 소송이 진행된다. 또 다음달 중 지씨 등을 대상으로 제기된 명예훼손 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라 열린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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