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폴리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자] <5> 폴리 투어-‘서원문 제등’·‘광주 사람들’
2018년 03월 29일(목) 00:00
100년의 역사 복원 … 문화 흐르는 문화플랫폼

옛 광주읍성의 서원문 자리에 들어선 ‘서원문 제등’(플로리안 베이겔 설계) 전경.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3월의 어느 봄날 저녁,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장동 로타리의 ‘소통의 오두막’(광주일보 3월 15일 보도)을 지나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났다. 광주 세무서 앞을 지날 땐 아름다운 멜로디(‘열린 장벽’)가 울려 퍼졌고 옛 광주MBC 앞의 ‘서원문 제등’에선 기억 저편의 ‘오월광주’가 떠올랐다. 이처럼 지난 2011년 광주에 모습을 드러낸 1차 광주폴리는 삭막한 도심을 한편의 풍경화로 바꿔 놓았다. 그중에서도 광주 동구 제봉로의 김재규 경찰학원 앞 버스 승강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서원문 제등’은 단연 돋보이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서원문 제등’은 서원문의 장소가 지닌 역사성과 제봉로 주변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작품이다. 1차 폴리 가운데 장식성에 치중한 몇몇 폴리와 달리 공간의 개념을 담아내 꾸준히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전적 건축양식과 문이라는 상징적 형태를 접목시켜 광주읍성의 동쪽 문이었던 서원문을 상징하고 동시에 주변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문 제등’을 설계한 건축가는 독일 출신의 플로리안 베이겔. 파주출판도시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는 그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 유독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1년 작품설계를 위해 광주를 방문한 그는 소쇄원과 국립 5·18 국립묘지를 둘러본 후 “광주는 아픈 ‘과거’ 속에서도 훌륭한 역사유적을 지녔다는 점에서 (건축가로서) 매우 흥미있는 도시”라며 “훌륭한 디자인 도시가 되려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건축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대로 ‘서원문 제등’은 옛 광주읍성터의 흔적을 복원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서원(瑞元)은 동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받으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1908년 철거될 때까지 동문 앞에 서 있었던 장승 한쌍은 지금의 전남대 박물관 앞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동문밖에 있던 경양방죽의 홍수피해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미뤄 도교와 풍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홍수피해를 막고자 했던 듯하다. 특히 그는 옛 광주MBC 앞에 세워져 있던 5·18 기념표지석과 한국의 석등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민주주의의 등불을 상징하는 공간을 설계했다.

베이겔의 바람이 통했을까. 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개막과 함께 첫선을 보인 ‘서원문 제등’은 시민들의 소통의 장으로 떠올랐다. 건축물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5·18 기념표지석은 1980년 5월 항쟁 기간동안 화재가 발생했던 옛 광주MBC 사옥의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문화플랫폼으로 시민들의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서원문 제등의 계단을 올라 가면 경찰학원 앞의 아담한 공간이 품안에 들어 온다. 바로 그 옆의 버스승강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소박한 일상이 머문다. 이처럼 ‘서원문 제등’은 다른 폴리와 달리 평범한 이웃들의 일상을 공유하는 장소로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이후 인근에 비움박물관을 필두로 은암미술관 등 문화공간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서원문 제등’은 금남로와 충장로, 동명동을 이어주는 교차로가 됐다.

‘서원문 제등’에서 중앙초등학교 쪽으로 걷다 보면 얼핏 새의 둥지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철 구조물이 등장한다. 미국 출신의 건축가 나데르 테라니의 작품 ‘광주사람들’이다. 중앙초등학교의 붉은 색 담벼락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폴리는 인근의 크고 작은 건물들과 이웃해 있다. 차가운 느낌의 강철봉이 얼기설기 섞인 외관처럼 다양한 형태의 주변 건물들과 혼재된 탓에 초창기 장소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광주사람들’이 들어선 곳은 옛 광주읍성의 동쪽 성벽(제봉로)이 북쪽 성벽(중앙로)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의 안쪽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대인시장, 예술의거리 등 광주의 명소들이 위치해 있어 늘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인다. ‘광주사람들’ 앞에 설치된 횡단 보도는 이런 지역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설계를 맡은 나데르 테라니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다. 100년 전의 흔적을 복원하기에는 현재의 주변 여건이 간단치 않아서다. 좁은 도로 폭에다 곳곳에 설치된 전신주, 하수관 연결부, 가로등, 그리고 기타 설비 장치들이 밀집해 있어 역사적인 장소를 건축적으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 건축가는 도로 가장자리에 늘어서 있는 가로수의 방향에 주목했다. 큰 면적을 필요로 하는 설계 대신 나무가 서 있는 지면과 하늘 사이의 자연공간을 파고 드는 컨셉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강철봉을 소재로 활용해 나무와 폴리가 공존하는 풍경을 제안했다. 즉, 불규칙적으로 교차하는 강철봉을 수직형태의 기둥으로 세운 다음 다시 공중에 떠 있는 수평구조물로 변환시킨 것이다.

광주비엔날레재단 광주폴리부의 안미정씨는 “작가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와 강철봉의 조합을 통해 자연과 빛, 광주와 광주사람들의 공존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건축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광주사람들’은 아직 시민들과의 소통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강철이 주는 차가운 소재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시각적으로’ 주변의 건물과 상충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광주사람들’이 광주사람들로 부터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다양한 소통 노력과 홍보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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