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도시 아이콘이 되다] 〈12〉 2011년 런던 ‘워드 온 더 워터’
2018년 01월 22일(월) 00:00
소외이웃 위한 ‘물 위의 책방’ … 지붕 위에선 버스킹 공연

런던 리젠트 운하의 패딩역 부근에 자리한 ‘워드 온 더 워터’ 전경. 1920년대 제작된 바지선 책방에는 항상 세월의 향기가 묻어나는 헌책들과 지역뮤지션들의 음악, 그리고 다양한 스토리가 흐른다.

영국에서 단 하나 뿐인 ‘물위의 서점’. 2년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흥미로운 제목의 영상을 접했다. 런던 도심을 가로 지르는 리젠트 운하(Regent Canal)에 떠 있는 바지선(Barge), ‘워드 온 더 워터’(Word on the Water)였다. 영상속의 서점에선 경쾌한 리듬의 어쿠스틱 선율이 흘러 나왔고 서너 명의 행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배위에 진열된 낡은 책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이 내리 쬐는 ‘강가의 책방’은 마치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어찌나 아름답던지 7분짜리 영상이었지만 가슴이 설레였다. 그리고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어 나만의 ‘위시리스트’에도 올렸다.

지난해 가을, 마침내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그 곳’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서점은 영상 속의 모습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운하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압권은 ‘리틀 베니스’로 불리는 리젠트 운하 위의 작은 배. 물 위에 떠 있는 형형색색의 배들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운하 주변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약 10분쯤 걸었을까. 조금 전과는 다른 주변의 풍경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왔다. 20층 이상의 아파트와 세계적인 패션디자인 스쿨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 등 모던한 분위기의 고층건물이었다. 특히 하루 평균 수십만 명이 드나드는 패딩전철역과 그래나리 광장(Granary Squre)이 멀지 않다 보니 시간이 흐를 수록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유독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거리는 곳이 눈에 띄었다. 물어 물어 찾아온 ‘워드 온 더 워터’였다. 마치 요트의 돛을 연상케 하는 큼지막한 블랙 간판에는 ’Word on the Water’라는 흰색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바지선 지붕에는 마이크와 스피커 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선실 바깥에는 300여 권의 헌책이 보기 좋게 진열돼 있었다.

‘워드 온 더 워터’가 런던에 깜짝 등장하게 된 건 지난 2011년.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패디 스크리치(Paddy Screech·52)는 어느 날 리젠트 운하를 걷다가 지금의 파트너인 존 프리벳(Jon Privett·53)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젊은 시절,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알콜 중독자인 어머니를 직접 돌보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둔 후 노숙자와 마약중독자 같은 그늘진 이웃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 마다 리젠트 운하를 산책하곤 했는데 우연히 이 곳에서 대학 동문인 프리벳을 만나게 됐어요. 당시 친구는 전공과는 거리가 먼, 거리 가판대에서 25년간 책을 판매하고 있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를 위해 뭔가 새로운 일을 하자고 의기투합했는데 그게 바로 서점이었어요. 둘 다 영문학을 전공했던 터라 독서량도 많고 소장하고 있던 책들도 상당했거든요. ”

두 사람에게 큰 힘이 된 건 프리벳의 프랑스 친구 스테판 샤또(Stephan Chaudat)였다. 이름 대신 ‘캡틴’으로 불리는 프랑스 친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바지선을 좋은 일에 쓰라며 선물했다. 1920년대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배는 길이가 15m 쯤 돼 보이는 소형 사이즈로 그는 이 곳에서 수십 년 동안 생활했다.

‘물위의 서점’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는 존이 감명깊게 읽었던 빌리 브라이언트(Billy Bryant)의 ‘Children of Old Man River’에서 얻었다. 소설은 19세기 미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미시시피강을 무대로 활동했던 영국 이민자들의 순회공연선(showboat)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다양한 공연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던 이민자들처럼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에게 책읽기의 행복을 선물하자는 뜻에서다. ‘워드 온 더 워터’의 워드(Word)는 서양속담에서 ‘지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지선 서점을 오픈하는 데 큰 돈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읽었던 책들을 판매하기로 한 데다 직접 붓과 망치를 들고 배를 수리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장 신경 쓴 ‘공사’는 지붕 위 스테이지. 지역의 뮤지션이나 버스커들의 공연무대로 활용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고 음향 시설도 갖췄다.

2011년 5월, 만반의 준비를 끝낸 ‘워드 온 더 워터’는 역사적인 ‘출항’을 시작했다. ‘물위의 서점’은 등장과 동시에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는 헌책은 쓸모없는 폐지가 아니라 과거와 역사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는 엔티크로 여기는 영국의 정서도 한몫했다.

14km에 이르는 리젠트 운하를 무대로 활동한 ‘워드 온 더 워터’는 예상치 않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모든 선박들은 2주 마다 정박지를 이동해야 하는 런던의 운하법령으로 인해 영업에 큰 지장을 받은 것이다. 가령 공장 인근에 머물 때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2주마다 서점을 옮기다 보니 단골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2년 동안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자 존 프리벳은 허가를 받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 2개월간 무단 정박을 감행했다. 이에 리젠트운하 관리회사는 막대한 벌금과 즉각 철거 등 법적 조치를 취했다. 서점과 운하관리측의 팽팽한 대결은 급기야 지역사회의 이슈로 확대됐고 수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유명작가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와 벤 오크리(Ben Okri)가 페이스 북에 이런 사실을 올리면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논란이 커지자 지난 2015년 운하관리회사는 ‘워드 온 더 워터’의 영구 정박을 허가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워드 온 더 워터’에 열광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서점에서는 접하기 힘든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다. 물 위를 떠다니는 책방이라는 판타지 못지 않게 만만치 않은 독서편력을 지난 책방지기들의 서가 목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실 안에 마련된 실내 서가에는 장르별로 분류하는 여느 서점과 달리 ‘공존’이라는 테마 아래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 위인전이 필라테스 가이드 북 옆에 자리하고 있다. 영국의 베스트셀러작가 데이비드 니콜스(David Nicholls)의 장편소설 ‘원데이’(one day)는 미국 작가 찰스 부로스키(charles bukowski)의 ‘우체국’과 비틀스 음반 옆에 나란히 놓여 있다. 가격 역시 대부분 1권 당 10파운드(1만원)를 넘지 않는다.

무엇보다 ‘워드 온 더 워터’의 매력은 예술과 음악, 문학을 퍼뜨리는 발신지 이자 해방구라는 데 있다. 지붕 위에 마련된 오픈 스테이지에서는 재즈와 어쿠스틱 뮤지션들의 버스킹 공연, 시 낭송회 등이 끊이지 않는다. 매회 평균 300여 명이 찾을 만큼 리젠트 운하의 브랜드가 됐다.

/jhpark@kwangju.co.kr



※ 이 시리즈는 삼성언론재단의 기획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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