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부 여행과 문학
① 기대승과 이황이 주고받은 편지의 길
2017년 09월 26일(화) 00:00 가가
조선 성리학 찬란하게 꽃피우다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
조선의 16세기는 여러모로 특별한 시대였다. 크고 작은 사화와 정치적 혼란이 사회 상층부를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회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여기에 극적인 충격을 준 것은 외부적인 요소, 즉 1592년의 임진왜란이었다. 1392년 건국된 해로부터 계산하면 정확하게 200년이 지나 일본의 침략을 당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임진왜란 직전의 2세기 동안 조선의 사회 각 방면에서 축적된 잠재적 가능성들이 16세기에 이르러 사회 각 부분의 역량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사상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말에 도입된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200년을 지나면서 점점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고, 한국 성리학은 수입된 사상이 아니라 독자적인 철학적 문제의식과 결합된 사유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동시대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세 명의 유학자가 태어나 활동했는데, 사실상 이들은 훗날 조선 유학사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가들로 성장했다.
퇴계 이황이 1501년, 고봉 기대승이 1727년, 율곡 이이가 1536년에 태어났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1570년을 기준으로 하자면 1536년부터 1570년까지의 35년은 이 세 사람의 철학자가 동시대를 호흡했던 시기로서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봉은 이 세 명의 걸출한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봉으로 인해 호남 유학계는 조선 유학사라는 커다란 학술적 장에서 스스로의 학술적 수준과 위상을 증명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 성리학계의 철학적 탐구 방향을 결정짓는 사단칠정 논쟁의 당사자였기에 퇴계와의 만남은 더욱 뜻깊은 역사적 의미를 띄게 되었다.
이들의 만남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1558년 명종 13년 32세의 나이로 문과 을과 1등으로 급제하면서 낙남사대부의 아들이었던 기대승은 관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이 때의 한양행은 과거급제보다 더욱 중요했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급제 직후 한양에 머무르는 기간에 58세의 퇴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마주침은 훗날 조선유학사의 성격을 규정짓는, 즉 논쟁사로서의 조선유학사라는 통념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학술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말하자면 원효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던 중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 있을 것이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는 자각을 불러왔던 깨달음의 순간 이후에 불교가 조금은 더 ‘한국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비견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 만남을 통해 고봉은 논쟁사로의 조선 유학사라는 이미지를 정초시킨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철학사적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호남 지성사는 고봉을 낳음으로써 비로소 한국 사상사의 한 축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이 순간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분명한데, 다른 한 가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봉의 ‘연보’는 1558년 10월 문과에 급제한 직후에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의 신분으로 한양에서 퇴계를 최초로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듬 해 3월부터 퇴계와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한다는 것까지는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퇴계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 첫 장면을 묘사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연구자는 고봉이 한양에 머무르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집에 조문을 간 자리에서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퇴계를 처음 만난 것 같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을 아직까지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처음 만남 이후 고봉과 퇴계는 친밀하게 서신을 주고 받았다. 1558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나는 1570년까지 13년 동안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오늘날 ‘양선생왕복서’와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라는 구별되는 두 묶음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스물여섯이란 연배 차이를 넘어서 때로는 스승과 제자처럼, 때로는 호각지세의 논쟁자처럼 많은 학문적 내용들과 삶의 고민들을 주고 받았다.
심지어 퇴계는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묘갈명’을 쓸 후보군에서 고봉을 빼라는 주문을 남기기도 했다. 고봉이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할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흥미롭게도 이 말을 들은 이들은 그 글을 쓸 인물로 고봉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해를 했고, 결국 ‘묘갈명’은 고봉에 의해 쓰여졌다.
그리고 퇴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고향에 은퇴해 있던 고봉은 새로운 선조의 명을 받았다. 조선의 출발 초기부터 대명 관계에서 조정의 뒷목을 붙잡게 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발탁되었던 것이다. 상경하라는 선조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한 고봉은 ‘변무소’를 쓰는 것으로 역할을 마감하고, 귀향하려 했으나 결국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11월 한양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던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태인에서 쓰러졌고, 결국 고부에 있던 사돈 김점의 집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세상을 떠난 후 고마산 남쪽에 고봉이 조성한 서실이었던 낙암(樂庵)은 망천사(望川祠)로 이름이 바뀌었고, 임진왜란 이후 망월봉(望月奉) 아래 동천(桐川)으로 옮긴 후 1654년 결국 사액서원인 월봉서원으로 탈바꿈했다. 대원군 시대에는 훼철을 거쳐 1978년부터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마을 깊숙한 곳에 들어서서 이제는 제법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서원이다.
과거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이곳은 몇 년 전부터는 국비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프로그램들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곳을 변모하고 있다. 작은 축제 같은 행사에서부터 서원 체험, 교양 및 전문 강좌, ‘살롱 드 월봉’ 같은 고전적 낱말과 현대어가 어우러진 개성있는 프로그램들이 남달랐는지, 성과 평가에서도 지속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관련된 이들의 남다른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나 있는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고봉의 묘소가 나오는데, 그치지 않고 쭉 이어지는 인적 드문 산길에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철인의 삶과 행적은 이 조그마한 길의 곳곳에 퍼져있는 시원한 산의 공기처럼 호남의 지성사에 스며들어 있다.
짤막한 네 글자로 개인의 품행과 내면세계를 요약해내는 문화적 관행은 흔히 후한 시대의 월단평(月旦評)에 근거를 돌리고는 한다.
송대에 들어 이런 인물평은 주희(朱熹)의 스승인 ‘이동’에게 얼음이 담긴 옥 항아리와 가을 하늘의 밝은 달과 같다는 의미에서 ‘빙호추월(氷壺秋月)’이라는 멋들어진 사자성어를 탄생시켰다. 애초에는 ‘주돈이’에게 쓰인 낱말이었던 광풍제월(光風霽月)도 호남의 작은 별서 소쇄원의 두 건물에 녹아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월봉서원의 중앙을 차지하는 강당에는 얼음처럼 깨끗한 마음과 눈처럼 밝은 달(氷心雪月)과 같다는 고봉의 기상을 기려 빙월당(氷月堂)이라고 우아한 당호가 걸려 있다. 서늘한 나무 마루에서 가을 햇살을 마주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빙월당주(氷月堂主)의 맑은 기상 한 조각을 얻어갈 일이다.
*이향준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연구원
-전남대 철학과 강사
-전남대 대학원 철학박사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전임연구원
-전남대 철학과 BK21사업단 박사후 연구원
-‘호남의 유학자들’ 등 저서 다수
이들의 만남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1558년 명종 13년 32세의 나이로 문과 을과 1등으로 급제하면서 낙남사대부의 아들이었던 기대승은 관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이 때의 한양행은 과거급제보다 더욱 중요했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급제 직후 한양에 머무르는 기간에 58세의 퇴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마주침은 훗날 조선유학사의 성격을 규정짓는, 즉 논쟁사로서의 조선유학사라는 통념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학술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말하자면 원효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던 중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 있을 것이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는 자각을 불러왔던 깨달음의 순간 이후에 불교가 조금은 더 ‘한국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비견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 만남을 통해 고봉은 논쟁사로의 조선 유학사라는 이미지를 정초시킨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철학사적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호남 지성사는 고봉을 낳음으로써 비로소 한국 사상사의 한 축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이 순간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분명한데, 다른 한 가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봉의 ‘연보’는 1558년 10월 문과에 급제한 직후에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의 신분으로 한양에서 퇴계를 최초로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듬 해 3월부터 퇴계와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한다는 것까지는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퇴계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 첫 장면을 묘사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연구자는 고봉이 한양에 머무르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집에 조문을 간 자리에서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퇴계를 처음 만난 것 같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을 아직까지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처음 만남 이후 고봉과 퇴계는 친밀하게 서신을 주고 받았다. 1558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나는 1570년까지 13년 동안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오늘날 ‘양선생왕복서’와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라는 구별되는 두 묶음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스물여섯이란 연배 차이를 넘어서 때로는 스승과 제자처럼, 때로는 호각지세의 논쟁자처럼 많은 학문적 내용들과 삶의 고민들을 주고 받았다.
심지어 퇴계는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묘갈명’을 쓸 후보군에서 고봉을 빼라는 주문을 남기기도 했다. 고봉이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할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흥미롭게도 이 말을 들은 이들은 그 글을 쓸 인물로 고봉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해를 했고, 결국 ‘묘갈명’은 고봉에 의해 쓰여졌다.
그리고 퇴계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고향에 은퇴해 있던 고봉은 새로운 선조의 명을 받았다. 조선의 출발 초기부터 대명 관계에서 조정의 뒷목을 붙잡게 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발탁되었던 것이다. 상경하라는 선조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한 고봉은 ‘변무소’를 쓰는 것으로 역할을 마감하고, 귀향하려 했으나 결국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11월 한양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던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태인에서 쓰러졌고, 결국 고부에 있던 사돈 김점의 집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세상을 떠난 후 고마산 남쪽에 고봉이 조성한 서실이었던 낙암(樂庵)은 망천사(望川祠)로 이름이 바뀌었고, 임진왜란 이후 망월봉(望月奉) 아래 동천(桐川)으로 옮긴 후 1654년 결국 사액서원인 월봉서원으로 탈바꿈했다. 대원군 시대에는 훼철을 거쳐 1978년부터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마을 깊숙한 곳에 들어서서 이제는 제법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서원이다.
과거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이곳은 몇 년 전부터는 국비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프로그램들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곳을 변모하고 있다. 작은 축제 같은 행사에서부터 서원 체험, 교양 및 전문 강좌, ‘살롱 드 월봉’ 같은 고전적 낱말과 현대어가 어우러진 개성있는 프로그램들이 남달랐는지, 성과 평가에서도 지속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관련된 이들의 남다른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나 있는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고봉의 묘소가 나오는데, 그치지 않고 쭉 이어지는 인적 드문 산길에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철인의 삶과 행적은 이 조그마한 길의 곳곳에 퍼져있는 시원한 산의 공기처럼 호남의 지성사에 스며들어 있다.
짤막한 네 글자로 개인의 품행과 내면세계를 요약해내는 문화적 관행은 흔히 후한 시대의 월단평(月旦評)에 근거를 돌리고는 한다.
송대에 들어 이런 인물평은 주희(朱熹)의 스승인 ‘이동’에게 얼음이 담긴 옥 항아리와 가을 하늘의 밝은 달과 같다는 의미에서 ‘빙호추월(氷壺秋月)’이라는 멋들어진 사자성어를 탄생시켰다. 애초에는 ‘주돈이’에게 쓰인 낱말이었던 광풍제월(光風霽月)도 호남의 작은 별서 소쇄원의 두 건물에 녹아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월봉서원의 중앙을 차지하는 강당에는 얼음처럼 깨끗한 마음과 눈처럼 밝은 달(氷心雪月)과 같다는 고봉의 기상을 기려 빙월당(氷月堂)이라고 우아한 당호가 걸려 있다. 서늘한 나무 마루에서 가을 햇살을 마주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빙월당주(氷月堂主)의 맑은 기상 한 조각을 얻어갈 일이다.
*이향준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연구원
-전남대 철학과 강사
-전남대 대학원 철학박사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전임연구원
-전남대 철학과 BK21사업단 박사후 연구원
-‘호남의 유학자들’ 등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