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역사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
2017년 08월 22일(화) 00:00
광복절 72주년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을 꺼냈다. 광복된 지 72년이 지나고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할 정도로 ‘반일감정’이 강한 민족에게는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우리의 근현대는 지독한 역설이었다.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내걸었던 분들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당했다. 그 후손들이 가난과 친구하며 배우지 못하는 건 당연한 미덕이었다. 게다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편을 갈랐기에 많은 분들의 독립운동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반면 친일파들에게 대한민국은 무척 따뜻하고 고마운 나라였다. 일본인들이 떠난 자리는 친일파들이 직위를 높이며 채워갔다. 그들은 자신의 재주를 일제의 식민 지배에 아낌없이 내줬고 그 공로(?)는 달콤했다. 친일파들은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후손들에게 ‘삼대가 먹고도 넘칠’ 재산을 넘겨줬다. 이완용의 증손자가 조상 땅을 찾아간 일은 ‘아재 개그’가 아닌 현실이었다.

영화 ‘암살’은 주인공이 자신들을 암살대로 뽑아 죽이려던 밀정을 처단하며 끝이 난다. 영화일 뿐 역사는 정반대였다. 1948년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첫 헌법에 친일파를 처단하는 특별조항(제101조)을 넣었다. 뒤이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법이 제정되는 과정이 희한하다. 괴청년들이 법안을 심의하는 국회에서 난동부리며 ‘반공’을 내세운 반민법 반대 집회를 정부가 지원한다. 경찰은 법 제정에 앞장선 국회의원들에 대한 테러를 사주하다 실패하자 이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체포한다. 일제 밀정이던 이종영(대동신문 사장)은 ‘반민법은 망민법’(亡民法)이라 조롱한다. 2009년에 국내외 학계 수 십 년의 연구와 자료를 모은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됐는데, 이를 주도한 연구소는 ‘종북 좌빨’ 연구소라며 테러당하고, 역사학계는 ‘좌파 학자’들이 모인 집단으로 전락했다. 1948∼49년에 반민법에 반대하던 구호와 행태가 21세기에 되살아나 씁쓸했다.

1949년 시작된 반민특위의 활동은 ‘옮음’과 ‘바름’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었다.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 최린(민족대표 33인), 최남선(독립선언서 기초), 이광수 등이 연달아 연행됐다. 그 중 친일경찰 노덕술의 체포는 압권이었다. 일제 때부터 ‘고문의 명수’로 악명 높던 그는 해방 후에도 수도경찰청(현 서울시경) 수사과장으로 사람들을 고문했다. 그 중에는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겹쳐지는 ‘밀양 사람’ 약산 김원봉이 있었다. 그 뒤 그는 의열단 동지들과 만나 울분을 토로한 뒤 북으로 갔다.

이전의 고문치사사건 주범으로 수배 중이던 그는 1949년 1월 25일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됐는데, 경찰관 4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연행하자 난리가 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불러 ‘치안 문제’라며 그의 석방을 겁박했다. 경찰들은 그를 비롯해 반민특위에 연행된 친일 경찰들을 석방하라는 신문 광고를 내고 동시에 파업하며 사표까지 냈다.

그럼에도 반민특위가 흔들리지 않자 1949년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서울시경국장 역임)이 이끄는 무장 경찰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그리하여 반민특위는 표지석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덕술은 무죄 석방된 뒤 군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헌병 장교로 근무하다 수뢰 혐의로 파면됐다. 4·19혁명 직후 치러진 7·29총선에 고향에서 출마했다.

해방 직후 한 논자는 “친일파를 숙청하는 것은… 이들은 독립조선이 자기네에게 처단을 내릴 것을 두려워하는 한편, 전일(前日)에 향유하는 권세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주독립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완전한 숙청이 없이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주건설은 바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주장처럼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자체로 비극이며 이후로도 많은 숙제를 남긴다. 일제가 만주에서 자행한 학살은 정부 수립 전후 재현되고 6·25전쟁 때는 더욱 심해졌고, 100만 여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이유 없이 학살당했다. 노덕술이 김원봉에게 저지른 고문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김근태, 권인숙, 박종철은 그 피해가 알려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백년’을 꺼냈는데, 그 출발점에 역사가 있다. 위안부, 강제징용,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5·18민주화운동, 세월호 등등은 끝맺지 못했다. 잘못된 과거는 풀지 못한 숙제가 되고, 현재와 미래의 또 다른 비극을 만든다. 과거의 잘못을,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다. 요즘 유행어가 된 ‘적폐청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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