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남지] 제6부-사상·종교의 산실 호남 (3)조선시대 숭유억불 이론 정당한가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2017년 07월 25일(화) 00:00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가 불교 신앙에 기반하여 백성을 다스렸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건국과 더불어 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되어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될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 건재한 전통사찰의 주요 건물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축된 것이며, 많은 불화나 불서들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다. 일반적인 이해처럼 지속적인 억불정책이 이어졌다면 어떻게 그 많은 문화재들이 전쟁이나 화재의 위험을 견뎌내고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이라는 말을 분석해보면, 숭유(崇儒)는 ‘유학을 숭상하다’는 의미이고, 억불(抑佛)은 ‘불교를 억압한다’는 뜻이며, 정책(政策)은 국가나 개인의 정치적 책략을 말한다. 이를 합하여 해석하면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국가나 개인의 정치적 책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숭유억불’이라는 용어는 근대학문으로 불교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1910년대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1∼1912년에 걸쳐 후루타니 키요시(淸谷隆)가 일본 발행의 ‘불교사학’에 연재한 ‘조선이조불교사개설(朝鮮李朝佛敎史槪說)’이 그 효시이다. 이후로 이능화, 에다 토시오(江田俊雄), 권상로,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 김영수 등에게 계승되어 조선시대 불교정책이 숭유억불이라고 규정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면밀한 분석 끝에 숭유억불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신라나 고려시대에 대한 상대적 의미에서 숭유억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공인되고 고려시대까지 숭불정책이었다고 할 만큼 불교는 전 국가적인 종교였다. 그러나 유학의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국가적 신앙은 개인적 신앙으로 바뀌었고, 성리학자들에게는 한낱 미신적인 것으로서 개혁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왕조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한국역사의 특수성에 비추어 본다면 시대를 규정하는 패러다임으로서 조선시대를 숭유억불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생겨나는 폐해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흔히 학자조차 조선시대를 숭유억불 시대였다고 규정하고 조선전기부터 지속된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조선불교는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또 1895년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에 의해 승려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을 숭유억불정책의 종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숭유억불이라는 말이 학계와 사회에 정착하면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줄곧 불교가 억압받은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과연 이러한 인식은 정당한 것일까? 500년 동안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선말기 승려 수가 7000명이나 상회하였던 것일까? 신라나 고려와 비교하지 않고 근대와 비교해서 조선 불교를 바라본다면 숭유억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90%를 상회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선시대 한자 문맹자들에게 불교신앙보다 성리학적 가치관이 더 중요하였을까?

일반적으로 억불이라는 용어 외에도 배불(排佛), 척불(斥佛), 벽불(闢佛)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벽불이라는 용어가 89회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척불 27회, 배불 4회, 억불 1회 사용되었다. 이는 500년의 역사 기록에서 볼 때 그리 많이 사용된 용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이 용어의 숫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조정의 대신들이 불교를 비판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특정 용어를 가지고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조를 기점으로 조선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사용된 용례를 보면, 조선후기에 벽불 2회, 척불 5회 등장하고, 억불과 배불은 사용된 예가 없다. 이는 조선전기와 후기를 숭유억불이라는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왕조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본 한국사 인식의 관점에서 조선 불교는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지 못한 채 연구되었다. 근대적 방식의 한국불교사 연구는 일본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고 정치사 연구의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불교연구가 진행되었다. 조선전기 ‘왕조실록’에서는 대신들의 벽불상소(闢佛上疏)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국왕은 오래된 전통이어서 일시에 혁거(革去)할 수 없다는 논리로 대응하며 교화(敎化)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벽불상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흔히 조선후기 불교는 이미 자생력을 잃고 거의 멸실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불교와 관련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고 더 이상의 벽불상소가 없는 것은 불교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불교 문화재는 조선전기에 비해 후기의 불교가 더욱 활발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수많은 사찰이 중건되고 불서(佛書)가 판각되었으며, 강원에서는 한문 경전 강의가 이루어졌고 제자들은 돌아가신 스승의 문집을 편찬하였다.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불교 활동이 다소 위축되었다고 하더라도 지방 불교는 건재하였다. 북쪽으로 묘향산, 동쪽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동남쪽으로 팔공산과 가야산, 남쪽으로 지리산과 두륜산 등지에서 불교는 번성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의승병들이 보여준 활약으로 인해 유학자들은 불교를 새롭게 인식하였다.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도(道)라고 비판하였던 불교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국왕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지켜본 유학자들은 임진왜란이 지난 후 승군제도를 통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 ‘왕조실록’에서 불교에 관한 기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왕조실록’에 기록이 없는 현상을 근대 불교사학자들은 조선후기에 불교활동이 거의 없었다고 진단하고 숭유억불이 더욱 강화되었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문화재와 문헌을 통해 우리는 그 주장의 허구성을 확인하게 된다.





* 이종수 순천대 교수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HK교수

-동국대 사학과 문학박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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