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7) 파르테논 신전은 왜 유네스코 엠블럼 모형이 됐을까?
위대한 유산 민주주의, 지키지 않으면 사라진다
2017년 07월 13일(목) 00:00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식 기둥으로 주춧돌이 없고 기둥머리 장식이 단순하다.

석회암 바위산인 아크로폴리스 언덕길을 오른다.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주로 나이든 서양인들이다. 휴가철이 아니어선지 젊은이들은 드물다. 노인들에게는 나름대로 생의 무게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친밀감이 든다. 특히 유적지에서 만나는 노인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유적지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파란만장한 희로애락의 개인사가 어찌 없으리.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라는 현실존재는 내 삶이 어떤 모습이건 간에 지난한 과거의 산물인 것이다.

아크로는 ‘높은’, 그리고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이므로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는 말이다. 여신 아테네, 포세이돈, 니케 신 등이 사는 신전들의 공간이다. 우리 역사의 신성한 소도 같은 곳이다. 미완(未完)의 존재인 인간의 간절한 발명 중에 하나는 신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인류는 기원전의 고대 그리스인처럼 그러한 과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니체나 사르트르의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되풀이해왔던 것이다. 신(神)과 무신(無神)은 비록 대칭의 단어 같지만 그것들은 상상력의 등가물(等價物)이 아닌지 알아보고도 싶다.



아테네 시가지를 다니다 보면 고대의 돌기둥들을 수시로 만난다. 돌기둥을 보기 위해 아테네에 왔나 싶을 정도다. 그리스인들은 왜 돌기둥을 세우려고 했을까.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돌기둥은 세 가지 양식이 있다고 학창시절에 배웠던 기억이 난다. 도리아식(Doric Order), 이오니아식(Ionic Order), 코린트식(Corinthian Order)이 그것이다. 그리스 유적지를 여행하려면, 이 세 가지의 기둥양식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아식은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살던 도리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에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을 지을 때부터 보여준 기둥양식이라고 한다. 도리아식의 특징은 주춧돌이 없고 기둥에는 세로의 골들이 얕고 길게 파졌으며 기둥머리에는 사발과 네모 판자 모양의 지극히 단순한 장식이 얹혀 있는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지 않나 싶다. 내 취향이겠지만 가장 끌리는 기둥양식이다. 안동의 병산서원 만대루 마루에서 보았던 듬직하고 꼿꼿한 기둥들이 연상돼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오니아식은 에게 해 연안의 이오니아인들이 창안해 내어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와 그리스 전역으로 퍼진 양식으로 주춧돌 위의 날씬한 기둥에다 덩굴손 같은 소용돌이 모양의 세련된 조각을 얹힌 기둥머리 때문인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재위시절 동방까지 전파된 코린트식은 번성한 상업도시 코린트에서 기원전 5, 6세기 때 화려하게 멋을 부린 양식인데, 아칸서스 잎을 한 다발 묶은 듯한 모양의 조각이 기둥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자 나를 압도하는 것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신전의 특징 중에 하나는 벽이 없다는 것이리라. 일행 모두가 여신 아테네를 위해 조성한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마치 깁스를 한 중환자처럼 복원 중이어서 다소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1호라는 위의(威儀)가 느껴진다. 기둥양식은 단순 간결한 도리아식이다. 페르시아전쟁을 치른 뒤 승전기념으로 기원전 479년에 시작하여 16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5세기 비잔틴시대에는 성모마리아 교회로 사용했다고 하니 당시 아테네인들의 문화적 충격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그리스 신들의 전통사상과 외래종교인 기독교 간에 격렬한 부딪침이 있었을 것 같다. AD 51년, 선교를 하고자 아테네에 온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있다고 저잣거리인 아고라에서 외친다. 그러자 아테네의 에피쿠루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사도 바울을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데려와 “네가 말하는 새 교리가 무엇인지 알려주겠느냐?”라고 청했다. 이에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보니 너희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이니라. 지나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글이 있는 제단도 있었노라.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면서 섬기는 그 대상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한 뒤 그들을 상대로 설교했다고 한다. 그래도 몇몇은 바울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자리를 떴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고 하는 여인 등은 바울의 설교를 더 들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희랍어에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그를 희랍철학자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희랍어에 능통한 바울이 아테네로 온 까닭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예수라는 신성을 투사시키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이런 전제가 가능하다면, 기독교는 희랍사상과 이란성쌍생아처럼 일정 부분 본질을 같이한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은사님의 아크로폴리스 강의가 또 다시 이어진다. 인문학 여행의 진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철학사에서는 사도 바울을 예수보다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측면이 있지요. 왜냐하면 바울 이전에 믿었던 유태교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종교였어요. 모든 인류의 원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예수를 보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다고 믿었으니 그래요. 한 마디로 아주 폐쇄적인 종교였지요. 물론 유태교의 생활규범을 얘기하고 있는 ‘탈무드’는 아주 교훈적인 책이지만 말이에요. ‘탈무드’는 어떤 가정에서든 종교가 불교든 유교든 도교든 상관없이 자녀교육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책이지요.

아무튼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어요. 바울이 시작한 일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하느님의 유태교를 탈바꿈시키는 것이었지요. 인류를 위한 하느님이라고 각성시키는 선교를 했지요. 다른 민족을 선교하려면 폐쇄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져야 했어요.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희생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는 쪽으로 선교하고 다님으로써 마침내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전환이 되지요. 가톨릭에서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는 보편성을 얻기 위한 방편이에요.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 그랬다며 빵과 포도주로 의식화해왔던 것이지요.”

어느 종교든 교조를 빛나게 했던 불세출의 인물이 나타났던 것 같다. 바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더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남인도에 ‘제2의 부처’라는 나가르주나(용수보살)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소승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대승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 역시 공자 이후에 전개된 관념유학이란 따분한 흐름에 주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실천유학의 길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AD 3세기의 서양 역사를 좀 보지요. 지금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제국을 세웁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제국을 세우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지요. 그때 동로마제국은 동서에 걸쳐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요. 그전까지 기독교도는 박해를 많이 받았어요. ‘쿼바디스’ 같은 영화에서 보듯 기독교도는 곧잘 학살당하고 속박당하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 같은 엄청난 권력자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니까 순식간에 세계종교가 되어 퍼져 나갔어요. 한편으로는 그리스문화의 찬란한 꽃들이 시들고 스러지게 되고요. 말하자면 AD 3세기 이후부터 기독교문화는 그리스문화를 밀어낸 뒤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지요.”

그런데 교회로 사용하던 파르테논 신전은 1453년 오스만 제국 때 이슬람사원이 되었다가, 1687년 베네치아 군대가 쳐들어와 탄약 창고가 된 신전을 포격하여 지붕이 날아가 버리는 등 파괴된 바람에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신전의 35% 정도라고 한다. 현재 복원공사 중이지만 병 주고 약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엠블럼의 모형이다. 유네스코는 왜 파르테논 신전을 참고했을까. 그 까닭은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정신’과 한 순간의 과실로 위대한 유산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깨우고자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글·사진 정찬주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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