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남지] 제5부 -도전정신과 정의로 빚어낸 역사 ③ 임진왜란 7년전쟁과 호남의병
2017년 06월 13일(화) 00:00
‘약무호남 시무국가’ 조선은 남도의 백성이 지킨 나라

김천일을 제향한 나주시 대호동 정렬사.

임란의병은 활동 목표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눠졌다. 지역별로 향토를 지킨 향보의병(鄕保義兵)과 국가방위를 목표로 싸웠던 구국의병(또는 勤王義兵)이다.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7도가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았고, 전라도의 경우에는 무주 금산지역이 적침을 받았으나 도내의 의병과 관군의 용전으로 적을 격퇴했다. 이로써 조선의 곡창지역인 전라도가 보존됨에 따라 호남의 의병이 유일하게 나라를 지키는 구국의병으로 활약했다. 임진년 5월부터 봉기한 호남의병이 북상해 경기도와 서울에서, 그리고 경상우도로 진군해 이듬해 6월까지 침략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당시 호남지방에는 구국전쟁을 주도했던 임진 5대의병이 있었다. 1592년 6월3일 도성탈환을 목표로 해 도내에서 가장 먼저 군사활동에 뛰어든 김천일 휘하의 ‘나주의병’, 담양에서 임란의병 최대 규모로 성군해 6월11일 6000대군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던 고경명 휘하의 ‘전라도 연합의병’, 7월 하순 보성 장흥 순천지역에서 일어났던 임계영 장윤 휘하의 ‘전라좌의병’과 화순·광주지역에서 최경회가 이끌었던 ‘전라우의병’, 그리고 10월에 장성에서 의병의 기치를 세워 경기도로 진군했던 ‘남문의병’이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김덕령 휘하의 ‘충용군’은 훗날 1593년 11월에 결성된 의병군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1년이 넘게 육·해상에서 펼쳐진 호남의병의 활약은 종횡무진으로 눈부셨다. 먼저 국가의 병참기지인 호남 전역을 지켜낸 가운데 도성탈환의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1593년 10월 마침내 국왕이 환도할 수 있게 했다. 그 동안 의병전투는 한겨울에도 그치지 않았고, 전국 각처의 작전지역에 군량을 조달했을 뿐 아니라 명군의 군사활동도 뒷받침했다. 영남지방에서 활약했던 전라좌·우의병은 곽재우 의병과 함께 당시의 3대 정예의병으로 맹위를 떨쳤다. 특히 임진년 12월 전라좌의병은 엄동설한의 천신만고 끝에 성주대첩을 달성, 성주 일원을 수복함으로써 경상우도에서의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와 같이 임란 7년전쟁의 선봉에서 국난극복의 동력으로 우뚝섰던 호남의병. 그러나 일도에 한정된 구국의병이 감당해야 할 수난과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고 더없이 처절했다. 그 중에서도 호남의 의병정신과 구국의 의병혼을 충격적으로 떨친 의병항쟁은 1592년의 제1차 금산성전투와 1593년의 제2차 진주성전투이었다. 금산성 혈전은 임란의병 최초로 고경명·유팽로·안영·고인후 등 전라도연합의병 지휘부가 집단적으로 순절한 사건이었고, 진주성 혈전은 김천일·최경회·고종후·장윤 등의 호남의병 지도층이 진주성의 함락과 동시에 역시 모두 순국, 한국 의병전투사상 극한의 희생을 치른 대표적인 의병항전이었다. 이 두 차례에 걸친 임란 최대 규모의 의병혈전은 전자가 1592년 초반에 호남을 지켜 조선왕조를 구한 의병전투였다면, 후자는 1593년에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방위함으로써 다시 호남을 지켜 결국 나라를 구한 의병항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시 호남의병은 그 활동이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전개됐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수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전라도 해상의병이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전라좌·우수영을 중심으로 연해지역에서 봉기한 의병이 때로는 해상의 관군인 수군과 결합해 해상전투에 참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안지역에서의 매복작전을 통해 적의 해상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해안지역에서 펼쳐진 의병전투가 주류를 이뤘다. 육상의 의병과는 달리 이들 해상의병은 대대로 해안지방에 거주해온 사람들이었으므로 육해상 작전에 모두 능한 민병조직이었다. 평소에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연해지역의 해상의병 중에는 스스로 군비를 갖추어 자발적으로 해전에 뛰어든 군사들이 많았다.

이순신의 장계와 ‘난중일기’에서 보듯이 순천의 향교유생 성응지 일가, 전만호 이원남 일가, 첨정 이기남 일가, 전봉사 정사준 일가, 백야도 감목관 조정, 여수의 정철 일가, 그리고 순천, 고흥의 의승장 수인과 의능 등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들은 “해상전투에 자원해온 뒤 군량을 스스로 마련하여 두루 공급하였을 뿐 아니라 적을 직접 토벌함에 있어서도 뚜렷한 전공을 세웠다”라고, 이충무공이 높이 평가했을 만큼 그들의 활약이 매우 컸었다.

전라도 해상의병의 활동은 수군의 전력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수군승첩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보인 피란민들의 활약 또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해상의병의 한 유형이었다. 피란민들로 구성된 해상의병은 가까운 장흥, 해남, 강진, 진도, 영암, 보성, 고흥 등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신분의 향민집단이었다. 그들 의병지도층은 향선을 동원하거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등 후방에서의 응원전이 계속됐으며, 명량해전 이후 호남 연해지역의 의병항전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됐다. 명량패전으로 인한 일본군의 보복공세가 한층 격화됨에 따른 격렬한 항쟁이었다.

강진, 해남, 영암, 보성, 고흥 등 해안지역에서 펼쳐진 해상의병의 활동은 1598년 중순까지 이어졌다. 해상의병의 대표적인 인사들로서는 영암, 강진지역의 전몽성, 김덕란, 유장춘, 박문립, 염걸, 윤신 형제와 보성의 최대성, 전방삭, 정회, 고흥의 송대립, 신군안, 김붕만 등의 활약이 컸다. 명량해전 직후에 벌어진 강진의 밤재싸움과 병치혈전, 1598년 고흥의 첨산전투와 보성의 안치혈전 등은 고립무원의 들녘에서 외롭게 싸우다가 대부분이 희생된 의병항전이었다. 임진왜란 중 호남지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해상의병은 전라도 연해지역민의 총동원체제를 상징하는 독특한 의병사례였다.

따라서 그들은 정규군인 전라도 수군과 결합돼 수군전력을 한층 보강함으로써 임란 7년전쟁을 이겨낸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볼 때 호남은 육해상에서 임진왜란 7년전쟁을 주도하여 조선왕조를 지켜낸 근거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필자가 최근에 ‘남도의 백성이 지킨 나라’(2016, 순천대 박물관)를 펴낸 것도 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원래 순천대 명예교수·승평지방사연구원장

-현 승평지방사연구원장

-한국 임진왜란사 연구회장, 사단법인 남도평화문화재단 이사장 역임

-저서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남도의 백성이 지킨 나라’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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