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4>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고창 무장봉기-부익부 빈익빈 양극화에 녹두장군 울고 간다
2016년 07월 04일(월) 00:00

동학농민혁명이 지역 민란을 벗어나 전국적 혁명의 출발을 알린 고창군 공음면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원 안)와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이 태어나고 자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 생가터.

주춤하던 장맛비가 세차게 뿌린다. 한바탕 우레와 어울려 한풀이하듯 빗줄기를 토해낸다. 먼지 가득한 세상을 말끔히 씻어버리겠다는 폼새다. 122년 전 오늘, 동학농민들이 그랬다. 수탈과 억압에 짓눌리던 농민들이 세상을 향해 죽창을 들었다. ‘보국안민(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그들의 맨 앞엔 녹두장군 전봉준이 섰다. 그리고 한바탕 시원하게 반봉건·반외세 혁명운동을 폈다. 이후 혁명의 기운은 4·19와 5·18,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지난 1일 빗줄기를 뚫고 고창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았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 녹두장군 전봉준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엔 안채, 사랑채, 서당 등이 있었으나 동학혁명 기간 중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채와 헛간만이 썰렁하게 복원됐지만, 고증을 거치지 않아 논란이다. 초가로 된 안채는 문이 꽁꽁 잠겨 겉돌 수밖에 없다. 안채와 헛간 사이 비석이 서 있다. 노래비다. 올해 초 작고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썼다. 쇠귀체다. 쇠귀체는 선이 굵어 힘이 있다. 또 소박하고 단아하고 조화롭다. 궁금하다면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을 떠올리면 된다. 그 글씨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마라 / 녹두꽃이 사라지면 / 청포장수 울고간다 // 새야새야 파랑새야 / 전주고부 녹두새야 / 어서바삐 날아가라 / 댓잎솔잎 푸르다고 / 하절인줄 알았더니 / 백설이 펄펄 / 엄동설한 되었구나’

이 노래는 교과서에도 등장한 동요이자, 민요요, 만가(輓歌)다.

누가 가사를 썼는지, 누가 곡을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이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수수한 가락의 노래다. 가락이 평안해 자장가로도 쓰였다.

이 노래는 또 만가(輓歌)다. 만가는 죽은이를 애도하는 노래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소리를 말한다. 동학농민군의 아내들이 전사한 남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구슬픈 가락을 듣다보면 어떤 한(恨)이 몰려오는 듯하다.

노래에 나오는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파랑새’는 농민군의 적인 외국군대, ‘청포장수’는 농민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 민중을 가리킨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민중들은 그 한과 슬픔을 하나의 노래로 풀어냈다. 이 노래는 망국과 일제, 군사독재를 살았던 이 땅 민중들의 고통과 고달픔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1855년 12월3일 태어난 전봉준은 나이에 비해 유난히 체구가 작았다. 반면 다부졌다. 얼굴은 차돌 같았고, 두 눈은 바위도 녹일 듯 빛났다. 그래서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설가 송기숙은 소설 ‘녹두장군’에서 전봉준을 이렇게 묘사했다. “작달막한 체구에 유독 눈이 빛났다. 체구가 오척 단구였지만, 다른 사람과 대좌를 하고 있으면 조금도 작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몸피는 작다기보다 그만큼 강단지게 느껴졌다.”

전봉준은 13살때 고향을 떠나 전주·태인·고부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누구보다도 더 절실히 참담한 현실과 사회를 경험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손화중을 통해 동학을 만났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은 조병갑 고부군수의 학정에 맞서 봉기한 ‘고부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20일 전봉준·손화중·김덕명·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부가 무장에서 반봉건 혁명의 ‘포고문’을 정식으로 선포, 지역적 한계를 벗어난 전국적인 대규모 농민대중 혁명의 출발을 알렸다. 고창군 공음면의 무장기포지가 이 곳이다.

4월7일 황토현에서 승리하고, 4월27일 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전라감영을 차지한 농민군은 양호토사 홍계훈과 ‘12개 폐정개혁안’의 협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해 자치활동을 폈다.

이후 일본이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해 다시 봉기한다. 하지만 11월8일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하고 만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에 은신하며 후일을 도모하던 중 12월2일 체포돼 다음해 3월30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19세기 말 봉건세력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에 맞서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 그는 압제자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민중들은 그에 대한 숱한 전설들을 만들어내고 노래를 지어 그를 기억하며 꿈을 이어가려 했다.

구전되던 이 노래가 오선지에 처음 옮겨진 것은 1934년 무렵으로, 연희전문 졸업반이었던 김성태 씨가 전래동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채보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이다. 국가기념일 제정을 놓고 12년째 갈등을 빚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전주화약일인 6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하려하자 혁명 발상지인 전북 정읍시와 고창군이 반발하고 있다. 반대가 거세자 문체부는 5일 정읍·고창지역 동학혁명 단체와 간담회를 통해 의견을 다시 수렴하기로 했다.

고창군과 정읍시는 “전주화약일은 농민군이 관군에 속아 희생만 치른 날로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 부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읍시는 ‘고부봉기일’과 ‘황토현전승일’을, 고창군은 ‘무장기포일’을 내세우고 있다.

내일(5일) 어떤 얘기들이 오갈지 모르겠지만,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은 지역을 넘어 혁명의 역사적 실체와 본질을 상징할 수 있는 날이 돼야 한다.

생가터 옆에서 ‘전봉준 전시관’을 운영하는 나병수(50)씨는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생가터엔 보고 느낄거리가 없어 실망하고 돌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전시관을 열었다”면서 “동학혁명은 특정지역의 일이 아닌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중혁명이기에 국가기념일도 이를 상징할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창 글·사진=박정욱기자 jwpark@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취재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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