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2>'최루탄가’와 6·3사태-1965 … 위안부 할머니는 없다 … 2016
2016년 06월 06일(월) 00:00

6·3운동의 출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1964년 3월24일 서울대 문리대생의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장면이다. 학생들이 불태운 것은 이완용과 이케다의 허수아비. 이완용은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면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 깊이 개입했던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을 상징하고, 이케다는 당시 일본 수상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용서하지 않는데 누가 용서한단 말이냐. 일본이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는 이유가 한일협정 때문이라는데…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토해낸 울분이다. 지난달 17일 해남의 공점엽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광주·전남에 홀로 남은 곽예남 할머니는 “나쁜놈, 나쁜놈”만 되뇌었다.

이들의 눈물과 통한은 일제강점으로 시작됐지만, 이들의 가슴을 후벼판 것은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이다. 박정희 정권이 배상 문제를 포기하면서 과거사 문제는 한일회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국교정상화 후 수십년이 지났지만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살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5·16 직후인 1961년 11월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 방문에 앞서 일본에 들러 일본 고위 정객들에게 “청구권같은 문제 신경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라고 호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진한 게 한일회담이다. 비밀리에 진행하던 한일회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64년 3월이었다. 정부가 5월까지 한일회담 타결·조인·비준을 한꺼번에 마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각계 원로는 물론 야당과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그게 6·3사태다.

6·3의 시작은 서울대 ‘3·24시위’였다. 이 시위는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매국노 이완용과 일본 총리 이케다(池田)의 화형식이었다. 시위대는 고장난 책상 다리로 만든 이완용과 이케다의 불타는 허수아비를 발로 짓밟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시위는 대중운동과 결합하면서 확대됐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경비정 모금운동’(평화선을 지킬 경비정을 마련할 기금을 모으자는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화여대생들은 구체적 실행방안으로 ‘전교생 7000명이 한달간 미장원 출입을 삼가고, 루주를 비롯해 화장을 하지 않는 등의 검소한 생활을 통해 절약한 돈을 모으자’고 제시했다. 이 운동은 널리 퍼졌다. 중앙여중·고 학생 2400명은 헌 신문지 800관을 모아 성금 4만5015원을 마련했고, 혜화국민학교 5학년 한 학생은 5년간 푼푼이 모은 3013원을 아낌없이 내놨다.

대학가는 연일 데모였고, 4·19 이후 가장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진압의 강도도 점점 높아갔다. 대학로와 종로5가 등지는 거의 매일 최루탄이 터져 재채기와 눈물의 바다가 됐다. 시위대 진압용으로 최루탄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두 달 뒤인 5월20일 오후 1시, 지금은 마로니에공원으로 바뀐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때 아닌 조사(弔辭)가 울려퍼졌다. 4000여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쓰인 만장을 드리우고 결연하게 섰다. 곧이어 5·16을 맹비난하는 성토문이 낭독됐다.

“1961년 5월16일 새벽 총성과 함께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일군의 청년 장교들에게 장악되었다…그로부터 3년, 무비판의 뒷장막에서 온갖 화려한 계획과 공약 뒤에 도사리고,…역사적 퇴보를 이 나라 민족사에 강요하였다…피로서 되찾은 한국을 일본 의존적 예속의 쇠사슬에 묶는 것이 근대화요, 자립이라고 거짓말하는 자,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 지내자! 영원히 잠들게 하자.”

박 대통령이 1964년 취임 후 내세웠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장사 지내 5·16을 역사적 퇴보로 규정짓고 이를 부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시위는 최루탄 대 투석의 대결이었고 오후 7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다. 100여명이 다쳤고 200여명이 연행됐다.

5월27일, 시위는 마침내 광주로 확산됐다. 이날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박 정권의 하야를 권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5·16이후 최초로 ‘하야’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이다. 당시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는 이렇게 보도했다.

“난국타개를 내세운 서울의 대학생 궐기에 뒤이은 학생들의 데모는 27일 상오 마침내 광주의 거리를 휩쓸었다. 전남대학교 학생 약 400여명이 불씨가 되어 산발적으로 경찰과 부딪힌 이날 데모는…‘신망잃은 박정권의 하야를 권고한다’ ‘법은 법대로 준수하여 민주기반 확립하라’는 프래카드를 들고 경찰 저지선과 충돌…”

전남일보는 이어 ‘광주학생구국투쟁위원회’ 명의의 결의문과 호소문을 실었다. 호소문을 보자.

“5월의 하늘아래 민중은 분노했도다…자유의 횃불 이땅의 내일의 주인공인 학생들이 바른 정치하란다고 모진 경찰봉에 고문을 당하고, 최루탄에 눈물을 흘려야만 할까요…이제 부정도 부패도 처벌 못하고 법을 법대로 운영 못하며 굶주린 백성도 못먹여 살리는 정부, 모든 책임을 남에게만 전가하는 정부는 믿을 수 없고 지지할 수 없는 정부가 아닐까요. 이제 우리 모든 나라의 주인이여 일어납시다. 통쾌한 모든 해결을 주든가 아니면 그만 물러나야 한다고 우리 모두 이러한 구국의 대열에 극한 투쟁을 전개합시다.”

5월30일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난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단식농성이다.

신동호는 자신의 저서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에서 “이날 오후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은 우리나라 학생운동 사상 최초로 채택된 새로운 투쟁형태였다. 당시 학생시위는 선언문이나 읽고 곧바로 가두로 진출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데모가도 애국가나 교가, 삼일절노래, 민족해방가 따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김지하가 농성을 주도하면서 한차원 격상됐다. 선동가·선동시·풍자연극·화형식·매장식·모의투표 등이 등장했고, 삭막한 농성장을 흥겨운 마당으로 만든 활력소였다”고 평가했다.

이날 시위에서는 ‘최루탄 박살식’을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게 ‘최루탄가’다. 6·3시위로 운동권에 데뷔한 김지하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곡조에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최루탄가’는 60∼70년대 시위현장을 풍미했고, 술만 마시면 부른 애창가였다고 한다.

6월 들어 시위는 더욱 확산됐다. 그리고 6월3일 단식농성 100시간을 돌파한 오후 5시경 대규모 시위는 대단원을 이뤘다. 서울 18개 대학생 1만5000여명 등 3만여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가장 격렬한 시위는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 일대에서 벌어졌다. 서울시청과 광화문을 잇는, 이순신과 세종대왕 동상이 자리한, 지금은 4·16 세월호 농성장이 있는 광화문광장이다.

이날 오후 6시께 시위대는 청와대 앞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됐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 병력이 투입됐고, 시위는 무력진압됐다. 이른바 6·3사태다. 3월24일부터 6월3일까지를 ‘6·3운동’이라고도 부른다.

2016년 6월, 52년이 지난 오늘은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이 한일합의의 중심에 있다. ‘철거하라’는 일본과 ‘꼭 지키자’는 국민, ‘방관’하는 한국정부…. 소녀상 뒤벽에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란 없고, 역사를 왜곡하는 나라에 발전이란 없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하고, 우리는 잊지 않겠다”라고 쓴 중3 학생의 글이 가슴을 적신다.

/서울 글·사진=박정욱기자 jw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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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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