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1> 임을 위한 행진곡-들불같은 삶 위로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2016년 05월 18일(수) 00:00
5월 시민군 윤상원·노동운동 박기순 영혼결혼식 소식에
김종률 등 광주 문화운동가, 황석영 집에서 비밀리 제작
발표 1년만에 전국서·세계 각지서 애창 …전경들도 불러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 윤상원 열사의 생가 담벼락에 그의 고뇌가 담긴 편지가 새겨져 있다. /최현배기자 choi@

노래란 단순히 음률과 가사의 결합이 아니다. 그것이 불린 시대의 역사,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이 공유하는 체험까지도 아우르는 총체적 융합물이다. 그래서 시대가 노래를 만들고, 노래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노래를 모티브로 시대를 조망하고, 노래 속 공간과 사람을 만나 당시를 떠올리며 현재를 되짚는다.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시대적 사건과 노래를 통해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고, 오늘의 과제를 묻는 기획을 마련했다.



5월이다. 5월 광주는 뜨겁다. 5·18 36돌을 맞은 광주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더욱 뜨거워졌다.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를 향해 ‘협치’는 간데없고 ‘불통’만 나부낀다는 비난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대관절 ‘임을 위한 행진곡’이 무엇이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를 관통한 노래다. 1980∼9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애국가’보다 더 친숙하다. 이 노래에는 민중가요로는 드물게 노랫말의 높은 서정성과 투쟁성,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비장미가 흐르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목숨과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출발점은 5·18광주민중항쟁이다. 5·18의 상징적 인물인 윤상원과 그의 아내 박기순이 주인공인 까닭이다.

신랑 윤상원은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외신기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5월27일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싸우다 계엄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는 계엄군의 진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에게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그의 말대로,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은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미국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당시 기사에서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 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고 윤상원을 묘사했다.

윤상원은 전남대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은행원이 됐으나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광천공단의 야학인 ‘들불야학’에 참여했고, 그때 만난 이가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를 휴학한 채 노동운동의 토대를 닦겠다며 공단에위장 취업해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연탄가스 중독으로 1978년 12월 세상을 떴다.

당시 윤상원은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있을 뿐이다…”라며 애끓는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들은 1982년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지(구묘역)에서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들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이 노래는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이 가사로 정리하고 김종률이 작곡했다.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뒤늦게 알게 된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이 황석영의 집에 모여 만들었다.

황석영은 1970년대 후반 소설 ‘장길산’을 쓰면서 광주·전남에 문화운동의 씨를 뿌렸고, 1980년에 광주 운암동에 터를 잡았다. 그는 서슬퍼런 시절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풀 죽어 지내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도 가슴 아팠다. ‘뭐라도 해야 겠다’싶어 지역 청년문화운동가들을 불러모았고,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소재로 노래극을 만들었다.

작곡자 김종률은 당시를 이렇게 전했다. “그때 10여명이 모였는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음악하고 문학이니까 이걸로 노래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2층 거실에서 조그만 카세트를 놓고 방음도 되고 보안도 되게 창문을 군용담요로 막아 놓고 작업을 했다. 원본 테이프를 들어보면 개 짖는 소리도 들리고 기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린다. 그만큼 절절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은 불과 1년만에 전국으로 퍼져 거대한 함성으로 되살아났다. 비밀리에 복제된 테이프가 대학가 노래패·연극동아리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이 노래는 모든 집회·추모제에서 애국가를 대신해 불리게 됐다.

하물며 시위 진압에 지친 전경들도 단체회식때 불렀고, 화이트칼라들의 송년모임 엔딩곡으로, 노래방 애창곡으로 자리잡았다.

노래는 세월을 거치면서 대항의 노래·투쟁의 노래에서 그 시절을 추억하는 회고의 노래가 됐고, 2002년 월드컵때는 붉은 악마가 선정한 공식 응원가로 거듭났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을 넘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이 노래는 나라 밖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홍콩에서는 ‘애적정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대만·타이·티베트·미얀마·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에서 불리고 있다. ‘한류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임’을 찾아 나섰다.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 윤상원이 나고 자란 생가다.

호남대 광산캠퍼스에서 송산유원지를 거쳐 황룡강변을 따라 임곡역으로 가다보면 천동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이다.

2004년 겨울 화재로 생가가 소실되면서 많은 유품이 불타버렸다. 그리고 다음해 5월 복원됐다. 이곳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들의 고귀한 삶을 배우는 자료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골목골목 헤매지 않도록 친절하게도 발자국 표시가 돼 있다. 발자국을 따라가다보면 시대의 어둠을 밝힌 윤상원을 만나게 된다. 방문을 열자 콧날이 오똑하고 각이 살아있는 잘 생긴 청년이 대금을 불고 있다.

그는 말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세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1974년 10월 군복무 중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분향소 옆에는 5·18을 대표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새겨져 있다. 생가에는 아내 박기순의 조그만 흔적도 느낄 수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떠올리며 윤상원이 던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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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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