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을 깨는 여성 정치인들
2016년 03월 11일(금) 00:00
1908년 3월8일 뉴욕 루트커스 광장.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요구는 참정권과 노동조합 결성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1975년. 유엔은 이날을 국제 기념일로 제정했다.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이다.

엊그제 제108주년 세계 여성의 날을 보내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을 생각해 보았다. 부끄럽게도 성차별 지표들은 악화 일로다. 우리나라에선 미국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건만, 공공과 민간을 망라한 여성의 사회 진출 현황은 바닥 수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임명한 여성 장관은 여성가족부 장관(3명)을 제외하면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유일하다. 지난 대선 당시 내걸었던 ‘여성이 당당하게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은 한참 빛이 바랬다.

여성 대통령 시대에 역설적으로 여성의 정치적 권한은 축소됐다. 우리나라 국회의 여성 비율은 16.3%로 세계 124개국 중 11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하위권이다. 근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여전히 남성 중심의 국가다.

심심풀이 삼아 역대 여성 국회의원의 명단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헌정사상 첫 여성 의원이었던 임영신, 여성만의 당이 아닌 정당에서 최초로 여성 당수(黨首:당 대표)가 됐던 박순천, 그리고 넥타이 매고 남장(男裝)을 한 정치인으로 유명했던 김옥선,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시인 모윤숙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초대 여성 국회의원은 딱 1명이었다. 여성 의원이 5명을 넘어선 것은 유신으로 유정회가 구성된 9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최초의 여성 의원은 제헌국회의 임영신(경북 안동) 의원이다. 옛 신문을 보니, 1949년 보궐선거를 통해 ‘유림(儒林)의 고장’에서 당선된 임 의원의 당선 인터뷰가 재미있다. “안동은 완고하고 배타주의적인 곳이요 여성을 멸시하는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나, 이제 이와 같은 고풍은 완전히 타파된 셈입니다.”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처음 입성한 의원은 17대 국회 장향숙 의원이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된 장 의원은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은 최초의 다문화가정 출신이다.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18대 총선까지 지역구에서 당선된 광주 여성 국회의원’은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 16대 김경천 의원(광주 동구)이 유일했다. 이후 19대 총선에서 박혜자(광주 서구갑) 민주통합당 의원이 당선돼 ‘광주 여성 의원 2호’가 됐다. 2014년 7·30 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략공천을 받아 당선된 권은희 의원(광주 광산을)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두 의원은 이제는 서로 다른 당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4·13 총선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다.

과연 이번 20대 총선에서는 이들을 포함해 광주 지역 역대 최다 여성 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까. 이번 총선 출마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넘쳐 난다.

하지만 세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박혜자·권은희 두 현역 의원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더민주 영입 인사인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가 당선될 수 있을지 여부에 쏠리고 있다. 일단 박혜자 의원(서구 갑)은 광주 8개 선거구 중 더민주당 소속으로는 유일한 현역 의원이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여성 국회의원이 재선에 당선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박 의원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선 의원으로서 성실한 의정 활동을 한 점은 인정되지만 그것이 당선을 보장해 줄지는 알 수 없다. ‘광주 최후의 더민주 현역 의원’인 박혜자 의원은 지역 최대 현안인 아시아문화전당 특별법 개정을 놓고, 때로는 눈물을 흘려가며 때로는 뚝심 있게 밀어붙여 대회 개최를 위한 마수걸이 국비 확보에 기여했다. 또 공공기관과 300인 이상 기업들이 매년 신규 채용시 지방 대학생을 35% 이상 채용하도록 하는 지역균형인재육성법을 제정했고, 상무소각장 대체시설 등의 국비 확보에도 성과를 냈다. 유권자들이 이러한 박 의원의 활동을 어느 정도만 평가해 준다면 재선의 고비를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 역시 초선 의원답게 묵묵히 지역 현안 해결에 힘써 왔다. 그의 활약상은 이미 전에도 언급한 바 있다.(‘50년을 기다렸다! 그곳에 오를 날’, 본보 2015년 9월18일자) 줄기차게 무등산 정상의 군부대 이전 문제를 파고들어, 드디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언젠가 무등산 정상을 시민의 품에 안겨 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광주여상 출신 고졸 신화,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서구 을)가 계속해서 성공 가도를 이어갈 수 있을지에도 이목이 쏠린다. 남들에게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얘기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밑바닥(연구 보조원)에서 시작해 처음으로 최고(임원)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아픔과 시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공 스토리가 유권자들의 표심을 얼마나 자극할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들은 과연 여성이라는 유리천장을 또다시 깰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박혜자 의원은 당내 경선에서 송갑석 후보를 이기더라도, 상대 당에 송기석·이건태·정용화 등 쟁쟁한 인물들이 대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권은희 의원 역시 장관 출신인 더민주의 이용섭 전 의원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할 판이고, 정치 신인인 양향자 전 상무는 국민의당 천정배 공동대표의 벽을 넘어서야만 한다. 이들 세 명 외에도 이 지역에서는 많은 여성 후보들이 20대 총선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총선은 호남 지역에서 국민의당과 더민주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인물 중심의 투표가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 만큼 여성 후보들의 선전이 기대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인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먼저 깨고 앞서나가는 이들이 있을 때, ‘여성이 당당한 사회’도 그만큼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주필〉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