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출신 이묵순씨] 돈보다 자유를 택한 쿨∼했던 그녀
2016년 01월 14일(목) 00:00
60년대 식 cool은 무엇일까? 독일에 간 간호사들의 전형적인 대답이 ‘돈 벌기 위해서’라는 이유에 그야말로 반기를 든 여자. 이데올로기적 자유는 아니다. 그저 집에서 탈출을 꿈꿨던 그녀는 지금 시대말로 핫하고 쿨한 여자다. 그에 비해 가족과 사회는 그녀의 자유를 탐하고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버지는 과년한 딸 묵순에게 남동생이라는 프레임을 설치했다. 밤에 외출할 때는 언제나 남동생이 보디가드로 따라붙었다. 혹시나 남정네들이 딸 곁에 치근댈까 걱정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파독 간호사 모집’ 광고를 보는 순간, 운명을 직감했다. 여고를 갓 졸업하고 주사기 한 번 만져보지 못한 그녀였지만 무조건 지원서를 냈다. 운명은 그녀 편이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당시치곤 165㎝의 큰 키에, 모델이 꿈인 묵순은 결과를 통보받던 그날 가수 윤복희처럼 미니스커트를 입고 고향인 광주 충장로 거리를 활보했다. 설레이는 마음에 독일 오기 전날 잠까지 설쳤다. 1970년 7월, 꽃봉오리가 톡 터져버릴 것 같은 곱디 고운 스무 살에 비행기에 올랐다.

“워매 근디, 독일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복으로 갈아 입으라고 하드라고. 비행기 안에서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우리가 짐승처럼 어디론가 팔려가는 기분이더랑게. 맘 잘 못 먹은 사기꾼이 몸 파는 데 데려가도 모르겠드라고.”

독일인 여자 간호과장은 한인 간호사들의 이름 대신 번호를 부르며 배치될 병원을 일러주었다. 독일에 온 이묵순(66)은 베를린 노이쾰른 종합병원의 외과에서 간호사로 첫 발을 내디디게 된다.



자유를 얻은 대신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통상 독일의 간호 업무는 기본적인 청소를 비롯해 환자의 대소변 처리까지 도맡아 한다. 묵순은 외과 병동생활 20년 만에 허리 디스크를 얻어 결국 다른 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파독 간호사들은 외국인으로 무시당할까봐 남들보다 두세 배는 열심히 일했다. 묵순도 그랬다. 언어 때문에 겪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한 번은 남자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엔테(Ente/ 오리고기)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묵순은 환자가 오리고기를 달라고 해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하도 이상해서 독일 간호사한테 물었다.

“하하. 그랬더니 독일 간호사가 박장대소를 하면서 자지러지는 거여. 그게 글쎄 엔테가 남자 소변기라지 뭐여! 내가 즈그들 속어까지 어떻게 알겄어! 미치고 환장할 일이제.”

그래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니 독일어도 조금씩 들리고 독일 삶에 적응해 갔다. 독일 온 지 2년이 되었을 때 맨 먼저 자동차를 구입했다. 남들은 고국에 돈을 보내는데 그녀는 개인 자동차를 샀고 주말에는 춤추는 클럽에 가서 업무로 뭉친 근육을 풀었다. 얽매였던 삶에 자유를 찾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강행했다.

사실 당시 독일에서의 생활비는 그다지 많이 들지 않았다. 기숙사 비용은 저렴했고, 음식비는 한 달 50유로면 가능했다. 약간의 적금을 넣고, 나머지는 자동차 유류비와 의상 구입비 등 품위 유지를 위해 사용했다.

당시 한인 간호사들 중 최초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자동차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인 간호사들이 짐 나르는 것을 부탁하는가 하면, 휴가 때는 로마로 스페인으로 자동차를 타고 내달렸다. 5년 후에는 영국산 오픈카로 갈아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 멋드러진 모자를 쓰고 거리를 달릴 때면 휘파람 소리가 거리 곳곳에서 터져나왔제. 흐미, 젊음이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그녀가 기억하고 싶은 명장면이다. 잠시 눈을 감은 묵순은 금방 스쳐가버린 청춘이 아쉬운 듯 했다.



당시 3년만 독일에서 일하다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던 간호사들은, 대부분 3년 후에 수령 가능한 개인보험을 가입했다. 묵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묵순은 3년 있겠다던 계획을 수정해 5년이 되던 해인 75년 처음으로 한국을 휴가차 방문했다.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묵순이 독일에 오던 해, 어머니가 9남매 중 막내 여동생을 낳았다.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했기에 생활은 크게 궁핍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삶은 고달프게 느껴졌다. 묵순은 큰 결단을 하고 부모님께 자신은 독일에서 뼈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그동안 모은 개인보험 수령금인 9000 마르크를 모두 털어 부모님께 드렸다.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독일에 돌아온 묵순은 같은 병동에서 일한 독일인 남자 간호사와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어찌나 잘 생겼는지 유명한 가수 페터 알렉산더 닮았드랑게. 그 얼굴에 홀딱 빠졌지 뭐여! 한인 간호사들 여럿 울렸제. 지금은 배도 나오고 영 형편 없구만.”

그 당시 노이쾰른 병원에는 파독 간호사들이 100여 명 일했다. 한창 연애 중일 때였다. 그 남자가 다른 한인 간호사 A와 사귀고 약혼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알아본 즉 한인 간호사 A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하지만 오해가 풀리고, 결국 묵순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진심을 알고 결혼했다. 그 한인 간호사 A는 지금 파독광부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A는 부담스러운지 묵순과 10여 년을 등을 지고 살았다. 그러던 중, 둘을 잘 아는 한인 간호사 언니 B를 통해 화해를 하게 되었다.

파독 간호사 B는 기구한 인생의 질곡을 겪었다. 한국에서 결혼까지 한 유부녀였지만,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좀더 돈을 벌고자 홀로 파독 행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3년을 일하고 보따리를 싸서 돌아간 한국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미 남편은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되어 있었고, 강제로 이혼을 강요당했다. 비탄에 잠긴 B는 다시 수속을 밟아 독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B는 한국에서 이혼을 하고 왔다는 파독광부와 동거를 하게 되었고 잠시나마 행복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고국을 돌아가겠다는 파독광부를 뒤따라 들어간 B는 또 한 번 절망했다. 한국에서 처자식이 버젓이 기다리고 있는 유부남 상태였던 것. B는 다시는 한국을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독일로 돌아왔다. 운명은 끈질기게 B를 괴롭혔다. 또다시 시간은 흘러 독일남성과 살게 되었지만 나중에 안 사실은, 그는 에이즈 환자였다. 에이즈에 전염된 B 또한 불행히도 1년 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간호사 B는 생과 이별하기 전, 가장 친한 묵순과 한인 간호사 A를 함께 병상으로 불렀다.

“살다 보니, 죽기 전에 오해를 풀어야 해.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감정 쌓여 사니? 이미 묵순은 그 남자와 결혼했으니 이제 서로 화해해!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더라고.”

죽음 앞에 선 선배 간호사의 말에 묵순과 A는 부둥켜 안고 울었다. 한인 간호사 B는 이틀 후 차가운 이국 땅에 쓸쓸하게 묻혔다.

B가 떠난 후 허리를 굽혀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젊었을 적엔 자유를 꿈꿨지만, 이젠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삶의 향기로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꿈꾸고 있다. 요즘 묵순은 고향인 광주의 꿈을 꾸곤 한다. 아버지의 간섭과 9남매의 시끌벅적했던 그 시간이 자꾸만 그리워져서 눈물이 난다. 그가 꿈꾸던 자유는 이미 지나온 시간 속에 녹아 흘렀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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