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속살같은 눈 위 적조로 선크림 제조?
<5> 수박 조류
2015년 06월 09일(화) 00:00

남극세종기지 주변에서는 가끔 빙수처럼 여러 색을 띤 눈을 볼 수 있다. 붉은 수박의 속살과 유사한 빛을 띠는 수박눈(watermelon snow)은 수박조류 클라미도모나스 니발리스(Chlamydomonas nivalis)가 증식한 결과다.

남극하면 온통 하얗고 아무것도 시시한 게 없는 풍경을 떠올리기 쉽다. 기본적으로 남극의 눈은 소금처럼 희고 무심하다. 그런데 남극 세종과학기지 주변에서는 가끔 빙수처럼 여러 색을 띤 눈을 볼 수 있다. 하얄 것만 같은 눈이 여러 색을 띠는 현상은 저온을 좋아하는 미생물이 폭발적으로 발생할 때 나타난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적조현상이 눈 위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빙설조류(氷雪藻類), 스노우앨지(snow algae)라고 불리는 식물 플랑크톤 담수종이다. 연구에 따르면 수박처럼 빨간 색을 띠는 눈은 클라미도모나스(Chlamydomonas)속 규조류가 증식한 결과이고, 아이스크림 빠삐코처럼 갈색을 띠는 눈은 장구말, 남조류 등이 증식한 결과이다. 녹차처럼 녹색을 띠는 눈은 유글레나(Euglena)가 증식한 결과이다.

이 중에서 수박색을 띠는 눈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보자마자 수박이 떠올랐다. 순순한 붉은 색이며, 쉽게 스러지는 질감이며 모든 것이 짙은 녹색의 과피를 칼로 쪼개 열었을 때 드러난 수박의 속살과 흡사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희미한 수박의 향기가 난다고 하여 이 눈을 수박 눈(watermelon snow)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담수종 식물플랑크톤 클라미도모나스 니발리스(Chlamydomonas nivalis)를 과감하게 ‘수박조류’라고 부르기로 했다.

수박 눈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동물지’이다. ‘해저 2만리’ 작가 쥘 베른이 1866년에 쓴 작품 ‘The Desert of Ice’ 에도 색이 있는 눈 이야기가 나온다. 북극탐험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실제로 북극 탐험이 가능하기 몇 십 년 전에 쓴 것이라 흥미롭다.

유럽에서는 중세부터 알프스 산맥의 붉은 눈이 기록되어 왔다. 탐험가나 박물학자들은 신발을 붉게 물들이는 이 현상을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겼다. 산화물 등이 암석에서 빠져나온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1818년 존 로스의 탐험대가 그린란드 북서쪽 기슭에서 채취한 붉은 눈을 영국에 돌아가서 분석했으나 명확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도 742년에 현재의 미야기 현 중부 평지에서 빨간 눈을 발견해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런 식으로 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이들에게 관찰된 현상이지만 19세기 말 광학현미경이 발견되고 나서야 붉은 눈이 조류의 대 발생에 의한 현상임이 판명되었다.

수박조류는 계통학적으로 원래 광합성 색소로 극지의 강렬한 자외선에 대한 보호기작으로 몸을 붉게 만든다. 수박조류가 수박색을 띠는 것은 아스타잔틴(Astaxanthin)이라는 카로티노이드 색소물질 때문이다. 아스타잔틴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자외선에 의해 생성된 체내 유해물질 일중항산소를 제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는 아스타잔틴이 체내에서 생화학적 효능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물리화학적으로도 선크림처럼 자외선 차단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지를 수박조류를 통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마음으로부터 재밌어 할 만한 것에 투신하고 싶었다. 평소 자외선 때문에 불편한 적이 많았다. 설명서가 시키는 대로 선크림을 꼼꼼히 목까지 바르면 깃에 묻어난다. 선크림을 안 바르면 맨 얼굴에 바람이 불어 와 닿는 느낌이 좋지만 자외선도 같이 불어와 닿는다. 화장품 원재료가 되려면 천연물일지라도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 재료로 섞어 쓸 수 있을 정도의 물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만약 태양광선을 활용해 살아가는 수박조류로부터 아스타잔틴을 천연적으로 추출해 낼 수 있다면 어떨까? 아스타잔틴은 불포화 화합물이어서 열과 빛에 의해 쉽게 파괴되어 활성이 감소할 수 있다. 따라서 수박조류로부터 천연상태의 아스타잔틴을 그대로 추출할 수 있다면 활성보존 측면에서도, 비용면에서도 관련 산업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수박조류는 햇빛을 받으면 선컵(sun cup)으로 불리는 움푹 패인 구멍을 만든다. 흰 눈에 비해 수박색 눈은 햇빛을 좀 더 잘 흡수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더 빨리 녹게 되는 것이다.

남극은 워낙 겨울철 일사량과 여름철 일사량 차이가 큰 곳이기 때문에 생활사도 다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UV차단 패널을 써서 겨울철 일사량을 구현해 보려고 했다. 류준한 기계설비대원이 UV차단 패널 고정장치를 솜씨 좋게 만들어주었다.

천연상태의 수박조류와 아스타잔틴이 피부에 주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인간의 세포를 배양, 진피부터 표피까지 피부의 전 층을 재현해 놓은 실험용 3D 피부모델인 인공피부가 필요했다. 개인이 구입하기에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기꺼운 지출이라고 생각했다. 출국 전 인공피부 회사 테고사이언스에 연락해 편지로 실험내용을 설명하고 구입의사를 밝혔다. 사장님 지시로 감사하게도 실험을 위한 인공피부 를 무료로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인공피부 배양액이 냉동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인공피부가 수평상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남극까지 비행기를 3번씩 갈아타고 34시간 비행을 하는 과정에서 신생아 다루듯 온 신경을 기울였다. 국토부와 인천공항 검역실에도 미리 연락을 해야 했다.

여러 장애를 딛고 처음 필드에 나갔을 때 황홀했다. 흰 눈은 흰 색이고 수박 눈은 수박색이었다. 같음과 다름이 함께 보였다. 유용성에 대해 연구계획서를 썼지만 사실 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이었다. ‘이 물질이 인간에게 어떻다’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아름다움에 설득되고 만다.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다.

아름다움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압력과 농도와의 관계, 기울기와 채도와의 관계, 펭귄 배설물의 영향, 선 컵의 깊이, 스쿠아의 방해 등 실험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계속 등장했다. 한국에서 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온 것과는 달랐다. 현장에서 들어오는 자극은 사고실험을 통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즉흥적이었다. 머리가 새롭게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1년을 보낸다면 많은 게 기록될 것이다. 나는 1년 동안 남극에서 수박조류 의 생활을 지켜보고 싶다. 남극의 하계 기간 동안 수박조류의 생태를 연구한 사람은 있었지만 수박조류의 1년 생태를 연구한 사람은 없었다. 뭔가가 ‘있다’는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없다’ 상태도 정의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연구는 수박조류가 눈에 띄지 않는 겨울철에도 계속될 것이다.

〈남극 세종과학기지28차 월동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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