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제과] 3代의 신용과 기술로 반죽하고 40여년 세월로 발효시켰다
2015년 03월 11일(수) 00:00
1984년 화재·프랜차이즈 공세 위기
당일 반죽·생산·판매 차별화로 승부
올림픽 金 서향순 덕에 팥빙수 ‘불티’
30년 된 공룡알·나비파이 스테디셀러

올해 42년을 맞은 궁전제과는 3대가 함께 꾸려간다. 92살의 나이에도 매일 제과점에 나오는 장려자 여사와 윤재선 사장, 윤준호 실장이 함께 자리했다.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어느 때부턴가 충장로 한 제과점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이들을 본다. 충장로 1가 1-9번지 궁전제과다. 서울에서 온 홍보사 직원이 부리나케 궁전제과로 달려가던 기억도 난다. 아내가 ‘공룡알빵’을 꼭 사오라고 했다며.

1973년 4월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연 궁전제과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식료품 가게 남원상회를 운영하던 장려자(92) 여사가 연 ‘궁전과자점’이 그 시작이다. 식료품 가게는 잘 됐지만 외상이 너무 많았다. 바로 옆 건물 ‘광진제과’는 밀가루 등을 많이 사러 오는데 모두 현금 장사를 하는듯했다. 마침 광진제과 건물이 매물로 나왔고, 남양제과 사장의 도움을 받아 연 게 ‘궁전과자점’이다.

상호는 인기가 많았던 2층 궁전다방에서 따왔다. 도너츠며 앙꼬빵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빵이 개당 15원, 20원 할 때, 하루 매상이 1만 5000원, 2만5000원까지 올랐다.

장남 윤재선 사장(71)은 이듬해부터 제과점 운영에 참여했다. 포항제철에 근무중이었던 그는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한전 광주지사로 직장을 옮겨 밤낮으로 일하다 1980년부터 제과점 일에 올인했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는 직원들의 잦은 이직이었다. 가게 문은 열었는데 진열장이 텅 비어 빵을 팔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빵 만드는 사람이 자주 바뀌면 안된다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직원들을 안아야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년에 두번 봉급을 올려줬다. 당시 생소했던 퇴직금도 도입했다. 30년 넘은 제빵사 등 장기 근속자들이 많은 이유다. 빵 만들기는 이론이 뒷받침 되어야한다고 생각해 공부도 적극 장려했다. 그 결과 든든한 자산인 제빵 기능장을 10여명 보유하게 됐다.

승승장구하던 궁전제과는 큰 시련을 맞았다. 1984년 12월 18일 전기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초원갈비, 충일그릴 등 11개 점포까지 불타 당시 소방서 추산 1억원의 피해가 났다.

“아마 그 때 수명이 10년은 줄었을 거다. 아끼던 종업원을 잃었고 주변 가게에까지 누를 끼쳤으니 죄송할 따름이었다. 보험금은 다른 가게들에게 나눠줬다. 다시 일어서야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최신식 기계를 사고, 인테리어도 새롭게 했다.”

1985년 5월 다시 문을 연 궁전제과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종업원들이 빵을 담아줬던 데서 벗어나 고객이 직접 집게를 들고 빵을 고르는 셀프 시스템도 도입했다. 궁전제과는 또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1990년대 프랜차이즈 빵집이 몰려오기 전까지다.

“초창기 10년 정도는 프랜차이즈의 할인 공세에 너무 힘들었다. 기계로 만들어내는 빵과 일일이 손으로 빵을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르다. 당일 반죽해 숙성시키고 당일 생산, 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했다. 차별화된 제품과 착한 가격으로 승부하며 위기를 돌파했다. 지금은 우리 지역에도 특색 있는 소규모 빵집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궁전제과는 한미쇼핑 지하에 첫 분점을 오픈했었다. 인연이 있었던 한미제과점이 한미쇼핑을 지으면서 요청해 와 들어갔지만 1년여만에 그만뒀다. 본격적인 첫 분점은 1994년 문을 연 두암점이다. 이곳에 광주제과기술학원도 함께 열었다. 이어 염주점(1996), 진월점(1997), 운암점(2006)이 문을 열었고 지난해 4월 수완점이 오픈했다.

궁전제과에서는 연극제나 합창단 공연의 티켓을 팔기도 했다. 윤 사장은 ‘궁전 커플’도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제과점 2층은 미팅하고 데이트 하던 장소였다. 아이들과 함께 와 “여기가 엄마랑 데이트하던 곳”이라며 빵을 사가는 아빠를 볼 때면 흐뭇하다. 타 지역으로 시집간 딸 아이가 입덧으로 고생하는데 궁전제과 빵을 찾는다며 빵을 사러 온 친정어머니의 마음도 고맙다.

궁전제과 팥빙수와 얽힌 사연도 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양궁 금메달을 딴 서향순에게 “광주에 내려가면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기자가 물었다. 그녀의 답은 “궁전제과 팥빙수”였다. 이틀 후 서향순은 궁전제과에 와 팥빙수를 먹었고, 전국 방송을 타게 됐다. 마침 여름철이라 한동안 팥빙수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현재 궁전제과에서 만들어내는 빵은 120∼130 종류. 초창기에는 옥수수빵과 앙꼬방이 인기였다. 요즘 가장 많이 팔리는 건 30여년된 ‘공룡알빵’과 ‘나비파이’다. 궁전제과에 다녀본 사람치고 이 두빵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 없을 거다.

‘공룡알빵’은 TV에서 요리강사가 바게트를 잘라 ‘터널 샌드위치’ 만드는 걸 보고 윤사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에는 바게트로 만들다 지금같은 둥근빵을 반으로 잘라 ‘계란 샐러드’를 채워넣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초 이름은 ‘프랜치 샌드위치’였지만 고객들이 ‘공룡알빵’이라고 부르면서 그게 굳어졌다. ‘나비파이’는 겹겹이 싸인 파이를 한장 한장 찢어먹는 재미가 그만이다. 빵에는 ‘전자레인지에 20∼30초 데운 후 드시면 가장 맛있습니다’ 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윤사장은 서울 리치몬드 제과점, 김영모 빵집, 이성당 등 오래된 10여개 빵집들과 ‘한울회’에서 활동한다. 2달에 한번씩 모이는 모임이 30여년이나 됐다. 일본 유명제과점을 방문하기도 하고 인기 제품 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제 다들 노인이 돼 모이면 옛날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며 웃었다.

궁전제과에서 빵을 만드는 이는 70명 정도다. 판매직(30명)과 알바생(50명)까지 합치면 150여명 대가족이다. 1년 매출은 70∼80억 정도. 이번 설 연휴기간에는 하루 4500만원어치를 팔았다. 충장점 일 매출액은 700만원∼800만원정도다. 주말 매상의 20% 정도는 외지 사람들이 채운다.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윤사장은 일본을 방문할 때면 딱 한가지가 부러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금 문제 등으로 10년 정도 영업해 돈을 벌면 업종을 바꾸곤 했다. 이걸 ‘모자 바꿔 쓰기’라고 하는데 이래서는 신용과 기술이 축적될 리가 없다. 일본에서 4∼5대 대를 이어 과자점을 운영하는 걸 보고 우리 가게도 꼭 ‘대물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경제과학교에서 3년간 공부한 아들 윤준호(41) 실장이 11년전 자재과 근무를 시작으로 제과점 일에 뛰어들었다. 올해 아흔 두살의 ‘빵 할머니’ 장려자 여사 역시 요즘도 매일 2∼3시간씩 충장로 본점에 나온다. 비닐 장갑을 끼고 빵을 정리하는 게 그의 일이다. 3대가 함께 뛰고 있다. 윤 사장의 꿈은 현실이 됐다.

“궁전제과 하면 광주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한다. 규모로 승부하던 시대는 지났다. 역사와 전통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도전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빵은 신선함이 가장 중요하다. 정성 들여 자주 구워내는 것, 그게 승부수다.”

어깨가 무겁다는 윤실장은 “우리 동네 자랑스런 빵집”으로 오래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궁전제과 충장 본점 062-222-3477.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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