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고수들 찾아 무대로…예술 여정은 계속됩니다
2026년 02월 04일(수) 00:20 가가
전통예술연출가 진옥섭 담양문화재단 대표이사
공옥진·김금화 ·한애순 등 숨은 명인 찾아
수년간 인터뷰 공연 기획 ‘노름 마치’ 출간
BTS 컴백 앨범 ‘아리랑’ 제목 듣고 ‘전율’
담양 용흥사 행사 등 기획자로 활동 계속
고향 담양 문화·예술 위한 ‘숙제’ 마음에 담아
공옥진·김금화 ·한애순 등 숨은 명인 찾아
수년간 인터뷰 공연 기획 ‘노름 마치’ 출간
BTS 컴백 앨범 ‘아리랑’ 제목 듣고 ‘전율’
담양 용흥사 행사 등 기획자로 활동 계속
고향 담양 문화·예술 위한 ‘숙제’ 마음에 담아


우리시대 숨은 고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의 저자 진옥섭 담양문화재단 대표이사가 광주 강연이 열린 비움박물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지난 2007년 전통예술연출가 진옥섭(61)의 책 ‘노름마치’를 읽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공옥진·한애순·하용부·김금화·한승호 등 내로라하는 명인들의 삶을 다룬 책을 빨려들듯이 읽었다. 남사당판 은어인 ‘노름마치’는 ‘놀다’의 ‘노름’과 ‘마치다’의 ‘마침’이 결합된 말이다. 그가 나와 한판 놀고 나면 누가 나서는 게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한다는 뜻으로 ‘노름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뜻한다.
책을 읽으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 시대 명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에 울컥했고, 이들의 삶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표현해낸 진옥섭의 글솜씨에 놀랐다. 고수를 찾아 전국을 떠돈 그는 초라한 집에서, 시장통 국밥집에서, 동네 다방에서, 노인정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온몸으로 글을 써냈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인터뷰를 하며 글쓰기 내력을 들었다. 그는 책을 쓸 당시 어르신들의 몸짓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면 자신에게 화가 나 “숟가락으로 눈깔을 파 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바깥에 나가지 않고 죽어라 글만 쓰기 위해 갖고 있던 옷을 모두 세탁기에 다 넣어버린 후 상가에 갈 때만 옷을 꺼내 에어컨 실외기 바람에 말려 입고 갔다고도 했다. 그렇게 죽을 듯 썼으니 그런 글이 나올 수밖에. 그렇게 온 마음으로 썼으니 어르신들의 삶이 독자들의 가슴에 박힐 수밖에.
◇공옥진·김금화 고수들의 이력서 ‘노름마치’
한국문화의 집 예술감독과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을 지냈던 그는 2024년 고향인 담양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해 ‘삼서사담’(3일은 서울, 4일은 담양) 생활 중이다. 이번 달 임기가 끝나는 진 대표를 지난 30일 비움박물관에서 열린 ‘2026 비움박물관 인문학산책-비움에서 평화로’ 강연장에서 만났다. 전국 곳곳에서 강연하고 공연을 기획했지만 광주는 처음이라며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감기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걸출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쉴 새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리 시대 고수를 찾아나서는 전통공연연출가로의 그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담양 용흥사에서 열린 ‘산중문답’ 행사는 그의 진가를 보여준 행사였다. 대웅전과 보제루에서 열린 행사는 주지 스님의 용흥사 동종 이야기, 담양 전통예술인들의 무대, 불화장(佛畵匠) 시연, 정관스님과 기순도 명인의 손맛이 더해진 공양까지 어우러지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재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열리고 있는 ‘김운태傳’ 역시 화제다. ‘노름마치’에도 등장했던 김운태는 채상소고춤의 일인자로 그의 말에 따르면 ‘춤추기엔 눈썹도 무거운 나이’지만 ‘자반뒤집기’ 를 선보이며 관람객들을 매료시키는 중이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시나요?” 인터뷰에서 첫 질문을 던지자 쑥스러워하던 그는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의 말을 들려줬다. “옥섭이 글은 맞춤법은 엉망인데 재밌더라.” 4학년 때 담양 읍내 영화관에서 ‘당산대형’을 본 후 이어진 ‘파란만장 이소룡 덕질’ 스토리도 유쾌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상경한 그는 재수 시절 배우가 되고 싶어 신촌 소극장에 견습단원으로 들어갔고, 연극을 잘하려면 춤을 배워 보라는 말에 탈춤을 추며 춤과 인연을 맺었다. 1983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명무전’에 갔다 눈이 번쩍 뜨였다. 노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데 단박에 “저기에 뭐가 있구나” 싶었다. 예술전문잡지 ‘객석’의 예술평론가상을 타며 무용평론가가 된 그는 첫직장이었던 서울놀이마당을 그만 둔 이후 숨은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어르신들 춤추는 모습을 보고 너무 좋았습니다. 마침 제가 공연 기획을 하니 그들을 다시 무대에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예전에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회갑잔치나 초상집 같은 데서 춤을 춰 정식 무대에 설 일은 거의 없던 분들이셨죠. 권번에 있었단 사실을 가족들이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었고요. 말을 자주 바꾸셔서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는데 어릴 때 할머니와 지내 노인들의 언어에 익숙했던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노인들 말은 ‘싫어도 싫은 게 아니고 기여도 긴 게 아니’거든요. 어르신들과 골방에 5분만 있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웃음) 할머니가 저에게 ‘너는 대님하기는 남고 허리끈하기에는 모잘라야’ 하셨는데 제 인생을 돌아보면 참 절묘한 말이었지 싶어요.”
◇ “글 안 풀릴땐 숟가락으로 눈 파버리고 싶은 심정”
화제의 책 ‘노름마치’는 그가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썼던 공연 보도자료가 기반이 됐다. 당시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는 공연을 알릴 수 있는 일은 ‘신문’에 실리는 길밖에 없었고 밤새 보도자료를 써서 모든 신문사를 찾아갔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중앙도서관에 가서 3개월, 6개월치 기사를 보며 각 신문사의 어떤 기자가 무슨 기사를 썼는지 일일이 체크했습니다. 당신에게 글쓰기 스승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기자들입니다. 나는 그 할머니를 수차례 만나 이야기를 듣고 수없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쓴 자료인데 가끔 어떤 기사를 보면 정말 명쾌한 질문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면 왜 나는 그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저 이야기를 놓쳤을까 헛개비처럼 만난 건 아닐까 철저히 반성하고는 했습니다.”
이런 악착같음은 그들을 무대에 세워야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좋은 무대도 손님이 없으면 무용지물. 지금도 그의 카톡 프로필에는 ‘표 아니면 피를 판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어쩌면 곧 돌아가실지도 모를 분들입니다. 손님이 오도록 무슨 짓이든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을 해서 이 분들의 공연에 합당한 출연료를 줘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공연에는 제자들만 왔지만 일반 관객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길바닥에 버려진 공연 전단지를 짓밟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언젠가는 이분들의 이야기를 써서 사람들에게 저 이름들이 밟히지 않도록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수천번 다짐했습니다.”
책 출간 제안이 왔을 때 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나보다 더 잘 쓸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추켜들었지만 고난의 행군이었다. ‘노름마치’는 수많은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책이다. 우리시대 고수들의 이력서이자, 우리 전통문화를 기록한 역사서이기도하다.
공옥진과 공연 담판을 짓기 위해 영광에 찾았을 때는 긴 설득 끝에 종이에 “공옥진 창무극 공연비 육벡만원 중 이백만원 밧고 남문 사벡은 끗남과 동시에 밧개되-였씀니다. 1995·12월 3일” 이라고 직접 쓴 글과 인주 대신 루즈를 묻힌 도장까지 받았다. 진 대표는 순천 출신 무속인 김순태·박경자 부부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이 메었다. 그가 기획한 무대에 오르기로 했던 김순태 어르신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아내인 박경자 어르신이 남편을 위한 ‘진짜 씻김굿’을 했다. 무대 위 굿상에 좋아하는 커피와 영정 사진을 놓으며 그는 생각했다. “어르신이 사진으로 출연하시러 이렇게 오셨구나.”
아버지 상가에서의 일화는 기념비적인 공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워낙 마당발이었던 그였기에 각양각색의 문상객이 몰려왔다. 발레리나와 무당이 한 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장사익은 ‘봄날이 간다’를 불렀다. 경남의 하용부는 손을 들어 춤을 췄다. 상황이 이쯤되자 그는 “상가라고 해서 하루 24시간 슬플일만은 아니다” 싶어 사회를 봤다. 그러다 문득 여기 모인 남자들로 춤판을 벌이면 출연료를 적게 줘도 될 듯했다. 그렇게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무대에 올랐고 이듬해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이 공연됐다. 평균 나이 80세 이매방·강선영·장금도 등이 무대에 오른 ‘전무후무(全舞珝舞)’ 공연에는 고(故)노무현대통령도 다녀갔다.
“그분들의 춤에는 예술이라는 이름에 앞서 고봉밥 한 그릇 벌기위해 노력했던 절실함이 담겨있습니다. 분명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를 이뤘는데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던 분들이죠. 심지어 가족에게서 조차도요. 그 분들이 일생을 통해 쌓아왔던 것들이 분말처럼 흩어지지 않도록 담아낼 방법으로 생각한 게 바로 공연이었습니다. 이미 끝난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축포를 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많이들 고마워하셨습니다.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외롭기도 하지만 잘해주셨던 것도 기억도 많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BTC 앨범 ‘아리랑’ 전율···K문화 성찰 필요
2020년 9월 BTS가 경복궁에서 촬영할 당시 궁 관리를 맡는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이었던 터라 BTS를 만날 수 있었던 그는 컴백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BTS가 그 이전에도 사자춤, 부채춤 등을 매개로 한 춤을 선보여 전통을 저렇게 활용하는구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데 그 준수한 청년들이 컴백 앨범 제목을 ‘아리랑’으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통수가 찌릿찌릿하더군요. 정말 통쾌했고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아리랑’을 어떻게 해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아리랑’을 타이틀로 앨범을 발매하다니요. 큰 반향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통음악과 춤에 대한 귀가 뚫리고 시야가 넓혀지고 유행을 넘어 깊이가 더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문화에 ‘K’라는 말이 붙는 게 유행인 듯합니다. K국악처럼 우리 전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한탕주의 K가 아닌, 지속적이고 오래가는 뿌리깊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필요합니다. 진정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진 대표는 담양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기획했던 일들이 예산문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영산강의 시원으로서의 담양을 이야기하고 면앙정 등 송순의 가사문학 공간, 소쇄원, 명창 박동실과 그의 손자인 가수 김정호로 이어지는 ‘노래의 길’을 조성하는 것이다.
“꿈에도 잊지 못했던 고향에 돌아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아쉽죠. 담양은 관광을 넘어 풍류를 팔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걷고, 노래하고, 힐링하는 여정을 만드는 게 필요하죠. 대표직은 떠나지만 고향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숙제 하나를 안고 갑니다.”
‘노름마치’는 지난 2013년 문학동네로 출판사를 바꿔 원래의 글에 어르신들의 근황을 추가해 다시 출간됐다. 나이가 들어 “걷는 것은 두려워도 춤추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고수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감동적이다. 일독을 권한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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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의 집 예술감독과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을 지냈던 그는 2024년 고향인 담양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해 ‘삼서사담’(3일은 서울, 4일은 담양) 생활 중이다. 이번 달 임기가 끝나는 진 대표를 지난 30일 비움박물관에서 열린 ‘2026 비움박물관 인문학산책-비움에서 평화로’ 강연장에서 만났다. 전국 곳곳에서 강연하고 공연을 기획했지만 광주는 처음이라며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감기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걸출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쉴 새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리 시대 고수를 찾아나서는 전통공연연출가로의 그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담양 용흥사에서 열린 ‘산중문답’ 행사는 그의 진가를 보여준 행사였다. 대웅전과 보제루에서 열린 행사는 주지 스님의 용흥사 동종 이야기, 담양 전통예술인들의 무대, 불화장(佛畵匠) 시연, 정관스님과 기순도 명인의 손맛이 더해진 공양까지 어우러지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재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열리고 있는 ‘김운태傳’ 역시 화제다. ‘노름마치’에도 등장했던 김운태는 채상소고춤의 일인자로 그의 말에 따르면 ‘춤추기엔 눈썹도 무거운 나이’지만 ‘자반뒤집기’ 를 선보이며 관람객들을 매료시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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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시나요?” 인터뷰에서 첫 질문을 던지자 쑥스러워하던 그는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의 말을 들려줬다. “옥섭이 글은 맞춤법은 엉망인데 재밌더라.” 4학년 때 담양 읍내 영화관에서 ‘당산대형’을 본 후 이어진 ‘파란만장 이소룡 덕질’ 스토리도 유쾌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상경한 그는 재수 시절 배우가 되고 싶어 신촌 소극장에 견습단원으로 들어갔고, 연극을 잘하려면 춤을 배워 보라는 말에 탈춤을 추며 춤과 인연을 맺었다. 1983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명무전’에 갔다 눈이 번쩍 뜨였다. 노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데 단박에 “저기에 뭐가 있구나” 싶었다. 예술전문잡지 ‘객석’의 예술평론가상을 타며 무용평론가가 된 그는 첫직장이었던 서울놀이마당을 그만 둔 이후 숨은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어르신들 춤추는 모습을 보고 너무 좋았습니다. 마침 제가 공연 기획을 하니 그들을 다시 무대에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예전에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회갑잔치나 초상집 같은 데서 춤을 춰 정식 무대에 설 일은 거의 없던 분들이셨죠. 권번에 있었단 사실을 가족들이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었고요. 말을 자주 바꾸셔서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는데 어릴 때 할머니와 지내 노인들의 언어에 익숙했던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노인들 말은 ‘싫어도 싫은 게 아니고 기여도 긴 게 아니’거든요. 어르신들과 골방에 5분만 있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웃음) 할머니가 저에게 ‘너는 대님하기는 남고 허리끈하기에는 모잘라야’ 하셨는데 제 인생을 돌아보면 참 절묘한 말이었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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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옥진 여사가 손으로 쓴 계약서. 인주 대신 립스틱을 발라 도장을 찍었다. |
화제의 책 ‘노름마치’는 그가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썼던 공연 보도자료가 기반이 됐다. 당시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는 공연을 알릴 수 있는 일은 ‘신문’에 실리는 길밖에 없었고 밤새 보도자료를 써서 모든 신문사를 찾아갔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중앙도서관에 가서 3개월, 6개월치 기사를 보며 각 신문사의 어떤 기자가 무슨 기사를 썼는지 일일이 체크했습니다. 당신에게 글쓰기 스승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기자들입니다. 나는 그 할머니를 수차례 만나 이야기를 듣고 수없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쓴 자료인데 가끔 어떤 기사를 보면 정말 명쾌한 질문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면 왜 나는 그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저 이야기를 놓쳤을까 헛개비처럼 만난 건 아닐까 철저히 반성하고는 했습니다.”
이런 악착같음은 그들을 무대에 세워야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좋은 무대도 손님이 없으면 무용지물. 지금도 그의 카톡 프로필에는 ‘표 아니면 피를 판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어쩌면 곧 돌아가실지도 모를 분들입니다. 손님이 오도록 무슨 짓이든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을 해서 이 분들의 공연에 합당한 출연료를 줘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공연에는 제자들만 왔지만 일반 관객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길바닥에 버려진 공연 전단지를 짓밟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언젠가는 이분들의 이야기를 써서 사람들에게 저 이름들이 밟히지 않도록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수천번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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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매방·장금도 등 평균 연령 80세의 고수들이 참여한 ‘전무후무’ 공연. |
책 출간 제안이 왔을 때 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나보다 더 잘 쓸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추켜들었지만 고난의 행군이었다. ‘노름마치’는 수많은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책이다. 우리시대 고수들의 이력서이자, 우리 전통문화를 기록한 역사서이기도하다.
공옥진과 공연 담판을 짓기 위해 영광에 찾았을 때는 긴 설득 끝에 종이에 “공옥진 창무극 공연비 육벡만원 중 이백만원 밧고 남문 사벡은 끗남과 동시에 밧개되-였씀니다. 1995·12월 3일” 이라고 직접 쓴 글과 인주 대신 루즈를 묻힌 도장까지 받았다. 진 대표는 순천 출신 무속인 김순태·박경자 부부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이 메었다. 그가 기획한 무대에 오르기로 했던 김순태 어르신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아내인 박경자 어르신이 남편을 위한 ‘진짜 씻김굿’을 했다. 무대 위 굿상에 좋아하는 커피와 영정 사진을 놓으며 그는 생각했다. “어르신이 사진으로 출연하시러 이렇게 오셨구나.”
아버지 상가에서의 일화는 기념비적인 공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워낙 마당발이었던 그였기에 각양각색의 문상객이 몰려왔다. 발레리나와 무당이 한 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장사익은 ‘봄날이 간다’를 불렀다. 경남의 하용부는 손을 들어 춤을 췄다. 상황이 이쯤되자 그는 “상가라고 해서 하루 24시간 슬플일만은 아니다” 싶어 사회를 봤다. 그러다 문득 여기 모인 남자들로 춤판을 벌이면 출연료를 적게 줘도 될 듯했다. 그렇게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무대에 올랐고 이듬해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이 공연됐다. 평균 나이 80세 이매방·강선영·장금도 등이 무대에 오른 ‘전무후무(全舞珝舞)’ 공연에는 고(故)노무현대통령도 다녀갔다.
“그분들의 춤에는 예술이라는 이름에 앞서 고봉밥 한 그릇 벌기위해 노력했던 절실함이 담겨있습니다. 분명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를 이뤘는데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던 분들이죠. 심지어 가족에게서 조차도요. 그 분들이 일생을 통해 쌓아왔던 것들이 분말처럼 흩어지지 않도록 담아낼 방법으로 생각한 게 바로 공연이었습니다. 이미 끝난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축포를 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많이들 고마워하셨습니다.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외롭기도 하지만 잘해주셨던 것도 기억도 많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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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담양 용흥사에 열린 ‘산중문답’ 행사 모습. |
2020년 9월 BTS가 경복궁에서 촬영할 당시 궁 관리를 맡는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이었던 터라 BTS를 만날 수 있었던 그는 컴백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BTS가 그 이전에도 사자춤, 부채춤 등을 매개로 한 춤을 선보여 전통을 저렇게 활용하는구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데 그 준수한 청년들이 컴백 앨범 제목을 ‘아리랑’으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통수가 찌릿찌릿하더군요. 정말 통쾌했고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아리랑’을 어떻게 해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아리랑’을 타이틀로 앨범을 발매하다니요. 큰 반향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통음악과 춤에 대한 귀가 뚫리고 시야가 넓혀지고 유행을 넘어 깊이가 더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문화에 ‘K’라는 말이 붙는 게 유행인 듯합니다. K국악처럼 우리 전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한탕주의 K가 아닌, 지속적이고 오래가는 뿌리깊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필요합니다. 진정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진 대표는 담양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기획했던 일들이 예산문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영산강의 시원으로서의 담양을 이야기하고 면앙정 등 송순의 가사문학 공간, 소쇄원, 명창 박동실과 그의 손자인 가수 김정호로 이어지는 ‘노래의 길’을 조성하는 것이다.
“꿈에도 잊지 못했던 고향에 돌아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아쉽죠. 담양은 관광을 넘어 풍류를 팔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걷고, 노래하고, 힐링하는 여정을 만드는 게 필요하죠. 대표직은 떠나지만 고향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숙제 하나를 안고 갑니다.”
‘노름마치’는 지난 2013년 문학동네로 출판사를 바꿔 원래의 글에 어르신들의 근황을 추가해 다시 출간됐다. 나이가 들어 “걷는 것은 두려워도 춤추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고수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감동적이다. 일독을 권한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