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껍데기처럼 누구를 품어 본 적이 있느냐”
2025년 12월 06일(토) 18:20
장성 출신 박형동 시인 일곱번째 시집 ‘껍딱과 알깡’ 펴내
‘김현승문학상’ 계기 출간…깊은 사유와 성찰, 울림 담겨

장성 출신 박형동 시인이 제7시집 ‘껍딱과 알깡’을 펴냈다. <박형동 시인 제공>

“나이 들어 은퇴를 하게 되고 뒷전으로 물러나 앉으면서 ‘인생은 ‘껍딱’이 돼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역할과 의미에 대해 사유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 그 상대 개념인 ‘알깡’과 연관해 생각을 했어요.”

전남문협 회장을 역임했던 박형동 시인이 7번째 시집 ‘껍딱과 알깡’을 펴냈다.

제목부터 이색적인 이번 작품집은 ‘껍데기’, ‘알맹이’의 전라도 방안인 ‘껍딱’과 ‘알깡’을 차용한 것이다. 장성이 고향인 박 시인은 어린 시절 그런 방언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시집 출간 소식을 전해온 그는 “10여 년 전 전남문협 회장을 맡아 일하느라 바빴고, 그 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한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며 “그러다가 최근 건강이 회복돼 ‘시집을 냈으면’ 하던 차에 지난해 뜻밖에 김현승문학상을 수상했다”고 시집을 펴내게 된 계기를 전했다.

광주시 예술상 부문 가운데 ‘김현승문학상’을 수상, 창작지원금으로 시집 발간을 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나오기까지는 저간의 아픈 사연도 있다. 박 시인은 “오랜 지병으로 거동을 못하던 아내가 치매를 앓게 되면서 이를 수발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로 ‘일시적 완전기억상실증’이 왔다”며 “다행히 3일 만에 정신이 돌아왔지만, 놀란 자녀들이 서둘러 아내를 요양원으로 보내게 되었다”고 그는 속엣말을 했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는 결정은 나의 완강한 반대로 몇 번의 번복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허리와 다리 통증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고 결국 요양원으로 보내게 됐어요. 매일 아내를 면회하고 돌아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겪었죠. 특히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성장한 탓에 저에게는 텅 비어 있었던 모정(母情)에 대한 그리움까지 겹쳐, 요양원을 오가며 많은 생각과 지난날을 돌아보게 됐어요. 이번 작품집에는 이에 대한 시들이 주를 이루며 사랑과 아픔, 뒤늦은 깨달음 등이 투영돼 있습니다.”

박형동 시인. <박형동 시인 제공>
기자가 아는 박 시인은 다형 김현승과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다형이 절대고독과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의 과정을 거쳐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의 시를 쓴 것처럼, 박 시인도 한때 깊은 고독과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때가 있다.

물론 시적 성취에 대한 부분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박 시인은 “끝내는 그의 자취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현승은 저를 아프게 한 분이기도 하다”고 자신을 낮췄다.

기자가 아는 박 시인은 따로 시를 배운 적이 없다. 혼자 시를 공부해오며 많은 시행착오 과정을 거쳤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흔한 것, 사소한 것, 버려지는 것, 그래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시를 쓰는 이유라는 것이다.

“더러움 속에서 아름다움을, 거짓 속에서 진실을, 미움속에서 사랑을, 하찮은 것에서 소중함을, 갈등 속에서 평화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시입니다. 길바닥의 풀꽃, 바위옷, 거미, 하루살이, 소금쟁이, 쇠똥구리같이 하찮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이며, 틈새, 자투리 땅, 걸레, 바보와 같은 것들이 시적 소재이구요.”

그에게 시는 그런 한찮은 것들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삶의 가치와 그 이치를 연구하는 일이자 그것은 곧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으로 연계된다.

박 시인이 이번 작품에서 표제로 내세운 ‘껍딱과 알깡’은 사실은 시가 아니다. 제4부의 갈랫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껍데기라고 억지로 벗겨내지 말라/ 너는 껍데기처럼 누구를 품어 본 적이 있느냐/ 껍데기처럼 따뜻하게 감싸 준 적이 있느냐// 껍데기처럼 필요한 것이 있더냐/ 껍데기처럼 거룩한 것이 있더냐// 어떤 시인은 껍데기는 다 가라고 했다지만/ 껍데기가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있더냐// 때가 오면 저절로 벗겨지리니/ 억지로 벗겨내지 말라/ 어머니 아버지가 너의 껍데기였듯이/ 너 또한 껍데기가 되리니”

시보다 더 시 같은 ‘말’이다. 인생 후반기에 이른 시인이 깨달은 삶의 지혜이자 연륜이 묻어난다. “어머니 아버지가 너의 껍데기였듯이/ 너 또한 껍데기가 되리니”라는 표현은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정작 우리 자신도 ‘껍데기’나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서로를 품고 다독이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박 시인은 중고등 시절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직에 입문해 벌교삼광여고, 광주경신여고에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광주지산교회 장로가 돼,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며 살아왔다.

한동안 몸이 아파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2014년 전남문인협회 회장이 됐을 당시,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 등에서 건강을 잃었다.

“대상포진, 늑막염, 통풍, 복시, 장염 등이 밀어닥쳤습니다. 모두가 회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늑막염으로 폐에 가득 한 물을 3리터나 빼내야 했는데, 숨을 쉴 수 없이 아파서 ‘하나님 제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정도였으니까요. 또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각각 따로따로 보이는 복시 현상이 심해서 운전도 독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물을 보려면 한쪽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병상에 있는 동안 한쪽 눈을 감고 100권짜리 세계문학전집과 삼국지, 초한지, 수허지, 태백산맥, 아리랑 등 소설을 읽었다. “눈물과 기도와 인내의 터널이었다”는 말에서 저간의 극복 과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다행히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셔서 5년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게 됐고, 지금은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며 “다시 시를 쓰고, 독서를 하고, 문학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현재 그는 광주신용도서관과 장성군립중앙도서관에 문예창작반을 개설해 글벗들과 함께 시와 수필을 공부하고 있다. 대부분의 글벗은 평소에 글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노인들이다.

“글벗들이 글을 쓰는 동안 자신들의 삶이 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매우 행복해 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시인, 수필가로 등단해 시집과 수필집을 낼 때면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지요.”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박 시인은 “글쓰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글벗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며 “또 하나는 ‘문불여장성’ 출신으로서 장성문학 발전을 위해 뜻있는 일 하나쯤 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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