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정신.역사 담은 ‘시민군 필체’ 나왔다
2025년 10월 14일(화) 19:10
‘승리의 그날까지’ 폰트 제작·무료 배포…광주 토박이 디자이너 박성영씨
5개월간 손으로 직접 그리며 틀 잡아 완성…큰 호응
“사용 범위 제한 없기를…개인·상업적 이용 모두 가능”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살인자 전두환’에 대한 화형식이 진행됐다. 굳은 표정의 시민군들은 하얀 천 위에 묵으로 굵은 글씨를 한자 한자 써내려갔다. ‘승리의 그날까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크고 투박한 글씨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싸웠던 시민군들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광주 토박이 디자이너 박성영(38·사진)씨는 플래카드 속 글씨를 본따 만든 ‘승리의 그날까지’ 폰트를 올해 한글날(10월 9일)을 맞아 무료로 배포했다.

박씨가 폰트 제작을 마음먹은 건 2020년 5·18 40주년 행사 슬로건을 접하면서였다. 우연히 보게 된 슬로건 ‘기억하라 오월정신, 꽃피어라 대동세상’에 포천막걸리체가 사용됐던 것이다.

“당시 포천막걸리체가 한창 유행이었을 때라 한 눈에 알아챘죠. 한용운체, 대한독립만세체 등 역사적 의미가 담긴 다양한 폰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포천막걸리 라벨에서 유래된 이 폰트를 사용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5·18의 정신과 역사가 담긴 폰트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됐죠.”

그는 올해 5월 사업 설계와 운영 등 기획의 전 과정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광주의 문화기획 전문학교 호랭이스쿨에서 5·18 사진집을 발견했고 사진집 속 ‘승리의 그날까지’ 플래카드를 보며 오랜 숙제같은 폰트 제작을 실현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선대 공대생이던 박씨는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다는 걸 느끼고 3학년 때 시각디자인과로 편입해 미대생이 됐다. 서른살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지인의 회사에 입사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지만 폰트 제작은 처음이었다.

그는 노하우를 얻기 위해 ‘양진체’를 제작한 김양진씨 SNS로 무작정 연락했다. 그에게 돌아온 답은 ‘손으로 직접’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언을 얻었다.

박씨는 슬로건이 찍힌 다양한 각도의 사진을 모조리 수집한 뒤 이를 바탕으로 손으로 한 획 한 획 직접 따라 그리며 틀을 잡았다. 조형의 간격과 비율을 보며 디테일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공을 들였다. 5개월간 폰트 제작에 몰두한 그는 한글날에 맞춰 무료 배포하기로 결심했다. 공개된 폰트는 다운받으려는 접속자들로 인해 서버가 폭주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상업적 이용이 불가한 대부분의 폰트와 달리 개인 및 상업적 사용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기가 더해졌다.

박성영씨가 개발한 ‘승리의 그날까지’ 폰트.
“5·18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용 범위가 제한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5·18 행사에 사용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수능 응원 문구나 개인의 다짐과 목표를 적는 등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폰트가 사용되길 바랍니다. 그때야말로 5·18 역사를 기억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FC의 불굴의 정신을 좋아한다는 박씨는 “시민구단으로 시작해 코리안컵 우승까지 달려가며 새 역사를 쓰고 있는 광주FC가 이 폰트를 사용해준다면 그 의미가 더 깊어질 것 같다”고 소원했다.

/글·사진=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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