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대, 맥락없는 질문은 곤란하다-명혜영 광주시민인문학 대표
2025년 03월 18일(화) 00:00
소통이 강조되는 요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경청’이 좋은 대화의 핵심일까.

많은 사람들이 ‘잘 듣는 것’이 대화의 기본이라고 하지만 정작 대화를 주도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요즘 일부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를 추상적으로 던지는 방식으로 장악하려 한다. 그렇다면 대화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는 소통이 가능할까.

생각해보니 오래된 지인 중에 경청보다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져 대화를 유도하는 이가 있다. 그의 대화 방식은 일률적으로, 맥락 없는 개념어(일명 뜬구름)를 일단 던지고 보는 식이다. 예를 들어 ‘정의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에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제시된 개념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설득력이 논리성을 이기지 못하면 곧바로 소외된다. 결국 구체성이 없는 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부터 얻어지는 답이란 십인십색이어서 목소리 큰 사람(?)이 대화의 장을 제압하며 끝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모임이 끝난 후의 뒷맛은 썩 개운치 않다.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하고 나면 자신의 정보 부족이나 얕은 지식을 탓하며 이제라도 인문학을 공부해야하는가 라는 반성 아닌 반성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인문학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대화 방식의 문제다. 이를 계기로 인문학 공부에 더욱 힘을 쏟는다면 질문 방식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정의하지 못해 “나도 모른다네, 그러나 자네는 자네가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는 반면에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하며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을 남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탐구했지만 결국 인간이 이를 완벽히 정의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놓친 것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 애초에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인식론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질문이란 ‘무엇’이 아니라 ‘누구’를 물어야 한다. ‘무엇’을 묻는 순간, 논의는 막연한 개념에 갇혀버리기 쉽다.

최근 청년들의 대화에서 맥락 없이 던지는 질문에 ‘갑자기?’하며 리액션에 난색을 표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갑분싸’의 주범으로 낙인찍히니 요주의. 가만히 보면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 주체들은 대체적으로 권위주의자들이거나 맨스플레인에 능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본인의 의견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강요하기 위해 토론의 방향을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몰아가고, 상대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만든다. 결론을 유도하는 방식 또한 설득보다는 강요를, 타협보다는 가르기를 부추긴다.

그러므로 질문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누구’의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설득과 공감이라는 정서를 경험하며 세계관을 교환하는 고도의 교제방식이 될 것이다.

대화에 성공하려거든 바라건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누구’를 물어라. 이렇듯,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과 삶을 바탕으로 질문을 던져야 비로소 대화가 흥미롭고 활발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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