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18 데자뷔에 밤잠 설친 광주 5·18 경험자들
2024년 12월 04일(수) 18:00
‘계엄’의 깊은 상처에 트라우마 경험…공포감 넘어 분노감에 잠 못 이뤄
“유혈사태 우려에 밤새 한 숨도 못 자” …당시 악몽 되살린 꼴

1980년 5월 16일 광주시 북구 용봉동 전남대 앞에서 전남대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광주일보 자료사진>

광주 시민들은 3일 밤 10시 30분께 전격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공포의 밤을 보냈다.

5·18 광주 학살 사건을 겪은 광주 시민들에게 ‘계엄’이라는 단어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계엄 선포 직후 계엄군이 국회의사당으로 강제 진입하는 영상이 유포되자, 1980년 전두환 정권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던 장면이 겹쳐 보였다며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를 경험했다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데자뷔’(기시감)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비상계엄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려졌고 이후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 이후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휴교령이 내려지자 전남대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한 것이 5·18 광주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모티브가 된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85)씨는 “‘계엄령’ 문구를 보자마자 1980년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놀라서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며 “국회로 침투하려는 계엄군을 시민들이 ‘계엄 해제’를 연호하며 막아서고 있는 장면은 마치 1980년 광주에서 학생들이 밀려들어오는 계엄군을 스크럼을 짜 막아서던 장면 같았다”고 했다.

5·18 당시 계엄군의 흉탄에 아들을 떠나보냈던 김씨에게 ‘계엄령’은 평생의 한이자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최근 소설 ‘소년이 온다’가 노벨상을 등에 업고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조금이나나 아픈 마음을 위로받고 있었는데, 기뻐할 새도 없이 정부가 나서서 악몽을 되살린 꼴이 됐다.

김씨는 “요즘 시대에 1980년대 방식으로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다”며 “무책임하게 계엄령을 내린 주모자를 지팡이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호소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저녁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서 군인들이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연합뉴스
5·18을 직접 겪었던 당사자들은 공포감을 넘어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이지현(73)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은 “계엄령 소식을 들었을 땐 도저히 믿기지를 않아서 거짓말인 줄 알았다. 2024년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며 “현 정부가 국민 정서를 무시하고 자기 원하든 대로만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접해서 그런지, 혹시나 44년 전처럼 유혈 사태가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돼 밤새 한 숨도 잘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국민을 진압하는 수단으로 계엄법을 악용해 겁박하고 있으니, 5·18 피로 새긴 민주주의를 저버린 것 같아 화가 났다”며 “정부 말대로 최근에 치안이나 국정 운영이 혼란스럽거나 위협을 받은 일이 어디 있었는가. 어떻게 명분도 없이 자기 안위만을 위해 계엄령을 내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5·18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로 활동했던 김태찬(63)씨는 “계엄군이 무장을 하고 거리에 나서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1980년 그 모습과 어찌나 똑같던지, 또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는 않을지 밤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며 “광주 시민들이 피땀흘려 일군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시민사회를 공멸하게 하는 행위다. 광주 시민들이 나서서 강력히 규탄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5·18로 계엄군에 피해를 입은 직접 당사자뿐 아니라 5·18 당시 광주에 있었던 광주시민도, 5·18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충격을 받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광주시민 노모(여·62)씨는 “‘계엄’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1980년 당시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도청 앞 분수대에서 다 함께 모였던 것, 상무관에서 52번째 관이 들어오던 것, 집에 숨어들어온 대학생을 숨겨주고 어머니들이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건네주던 것 등이 생생히 떠올랐다”며 “그 날이 똑같이 반복되는 건 아닐지, 몸이 벌벌 떨려서 새벽 2시 계엄 해제가 국회에서 가결될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광주에서 자영업 등 일을 하고 있는 이관영(32)씨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내일 일을 못 하면 어떻게 먹고 살지 생계가 막막하기도 하고,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하루아침에 앗아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눈앞이 캄캄해졌다”며 “비록 5·18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세대지만, 5·18 당시 광주시민들의 감정을 느낀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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