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싸움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11월 28일(목) 06:00 가가
좋은 소식이나 기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좋으니까 나누고 싶고 기쁘니까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자연스럽게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좋다는 것과 기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느껴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마음일 때가 많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느끼는 좋음과 기쁨의 정도가 다르고 나의 좋음과 기쁨이 다른 이들에게 꼭 그렇게 좋거나 기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좋음과 기쁨과는 달리, 진실은 사실을 기반으로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이나 역사적 사실이 토대이기에 개인적인 생각이나 마음으로 변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자기의 주장이 진실이고 다른 이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서로들 진실 공방이 많다. 수없이 접하게 되는 싸움과도 같은 이 공방(攻防)은 너무나 급변하고 새로운 엄청난 것이 돌출되기 때문에 혼란까지 야기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에 대해 혼란스럽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이미 마음으로 알고 구분하고 있다. 어느 정도 구분할 만큼의 충분한 지적 수준과 천지를 알 만큼의 지혜는 지니고 있다고 본다. 다만 굳게 지켜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자기의 자리와 위치, 만족감과 욕구 충족, 예상되는 편안함과 풍요로움의 유지를 위해 방관하고 멀찍이 서서 보고만 있을 뿐이다.
복음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당신의 가장 소중한 예수의 여정을 통해 전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 기쁜 소식은 선포되어야 한다. 기쁜 소식이기에 행복과 기쁨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소중한 가치이다. 그래서 복음을 읽고 묵상하여 생활하려고 하는데, 가톨릭 신자의 삶에서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복음화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복음화가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화가 되었기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복음화가 되었고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화가 되었기에 가능하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은 곧 진리를 가리키며, 진리는 곧 진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당시 시대의 기득권자들이었는데 지도자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로 권위를 가지고 영광의 자리를 누리고 있었던 불의하게 부를 축적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은 반대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와 누리는 부와 풍요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치부했고 적이 선동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수는 루카 복음 19장 46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기득권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하신다. 왜냐하면 기득권자, 율법학자들로 치부되는 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부를 등쳐먹고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을 착취하여 폭력을 일삼아 자신들의 부와 풍요를 누렸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은 이들에게 악의 소리였고, 자신들의 불의로 축적한 부의 탐욕을 방해하는 적의 외침이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았고 영원히 누릴 것으로 착각하는 극단적인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천박한 자본주의에 습관화되어 버린 병폐가 드러나 버렸다. 그래서 폭력을 쓰는데, 예수를 죽이려는 근거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형벌을 판결하도록 수를 쓴다. 그러나 복음, 기쁜 소식, 진리, 진실은 절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가 기쁨과 행복의 시대였으면 좋겠다. 서로가 웃으면서 아픔을 안아주고 어려움에 있으면 돌봄의 시대를 살았으면 한다. 그러나 복음, 기쁜 소식, 진리, 진실의 시대, 기쁨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고군분투는 끝나지 않은 듯 하다. 결국 진실은 이길 것이지만.
예수의 복음은 이들에게 악의 소리였고, 자신들의 불의로 축적한 부의 탐욕을 방해하는 적의 외침이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았고 영원히 누릴 것으로 착각하는 극단적인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천박한 자본주의에 습관화되어 버린 병폐가 드러나 버렸다. 그래서 폭력을 쓰는데, 예수를 죽이려는 근거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형벌을 판결하도록 수를 쓴다. 그러나 복음, 기쁜 소식, 진리, 진실은 절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가 기쁨과 행복의 시대였으면 좋겠다. 서로가 웃으면서 아픔을 안아주고 어려움에 있으면 돌봄의 시대를 살았으면 한다. 그러나 복음, 기쁜 소식, 진리, 진실의 시대, 기쁨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고군분투는 끝나지 않은 듯 하다. 결국 진실은 이길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