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부평초 같아야 -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08월 22일(목) 23:00 가가
일찍이 정약용 선생은 부평초를 일러 말하기를 “모든 풀은 뿌리가 있건만 부평초 홀로 뿌리가 없어, 물 위를 두둥실 떠도는 신세. 언제나 바람에 끌려 다닌다”고 하였다. 뼈 속까지 엘리트였던 선생은 귀양 가서도 항상 나라 걱정 백성 걱정뿐이었다. 그런 선생이었기에 연잎에 업신 당하고 마름에 칭칭 감기는 부평초를 보며 탐관오리들에게 핍박받는 백성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격조 높은 한시로 승화시켰다. 간간이 울리는 매미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어느 여름날 오후, 다산 초당을 혼자 지키며 연못 위 부평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생을 상상해본다. 아무래도 선생은 귀양살이에 지친 자신의 마음을 백성들 걱정으로 달랜 듯하다.
한편 20세기 들어 우리 시대의 진정한 가객이었던 김광석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끝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수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는 것”이라 하였다. 김광석은 비록 지금은 썩어갈지라도 봄의 새싹처럼 다시 일어나자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부평초를 그렇게 노래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기억 속에서 걸망 메고 부평초처럼 떠돌던 삶이 아스라이 멀어져 버렸다. 물론 섣불리 판단할 순 없지만 삶이 한 곳에 정착한 것 같다. 그 곳은 물리적 의미를 포함함과 동시에, 물리적 의미보다 확장된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물리적으로 나뉘는 대표적인 삶의 형태는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이다. 소위 수도권의 시민들은 메가 시티의 생태계 안에서 유랑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 안에서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개인으로 존재한다. 직장도 자주, 사는 아파트도 자주 바뀐다. 한때 노마드족이란 말이 유행했지만 기실 대도시적 삶의 본질을 낭만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지방 소도시에 뿌리내리고 살아보면 수도권의 삶이 왜 유랑형인지 금새 알게 된다.
지방 소도시의 시민들은 가시적으로 확인가능한 지역사회 속에 정주하여 살아간다. 개인의 삶과 운명을 지역사회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힘들다. 지역사회 속에서 개인의 익명성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지역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우리가 남이가~”, “우리끼리” 가 될 것이다. 특히 수도권과 비수도권은 이런 차이가 극명하다. 만약 태생적으로 지역사회에 속해 있던 경우가 아니라면,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고 안 되고는 개인의 의지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대신 기존 지역사회의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다. 일종의 객관적 기준이나 자격요건 같은 것보다, 지역사회가 품고 있는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일상적이고도 정서적인 수용이 더 중요하다.
개인의 삶을 놓고 보아도 삶의 방식은 유랑형과 정주형을 오간다. 어릴 적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정주형의 삶을 산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삶의 방식이 유랑형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춘의 특성 때문이다. 삶의 기반이 수시로 바뀌고, 일상을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자주 바뀐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사회활동에서 점점 멀어진다. 동시에 삶의 방식도 정주형으로 바뀌어 간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어느새 우리 사회의 삶에 대한 기대수준이 현격하게 높아졌다. 더 이상 단칸방에서 달랑 수저 두 벌 놓고 신혼살림을 시작하던 시대가 아니다. 승가사회도 이런 추세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어딘가에 기대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이제는 나이도 먹었다는 걸 실감한다. 몸도 고장났고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왠지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이 몰려온다.
21세기 인류인 나는 인터넷으로 부평초를 본다. 수생식물인 부평초는 이름처럼 물 위를 여기저기 떠다니며 유랑한다. 그러나 물 속으로 내린 뿌리는 아주 길다. 스스로 자기 중심을 확실하게 잡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뒤집어지는 일이 없다. 물이 고요하건 거칠건 상관하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겨서 시절 인연을 거부하지 않는다. 게다가 부평초로 많이 알려진 개구리밥은 의외로 다년생이다. 혹독한 겨울도 거뜬히 견딘다. 정약용 선생은 수면 아래 부평초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김광석은 혹독한 겨울도 견디는 부평초의 강인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유랑형 인생은 부평초 같은 것으로 비유되는 반면 상식은 한 곳에 뿌리내린 정주형의 삶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가이다. 인생은 부평초 같은 것이 아니다. 인생은 부평초 같아야 한다.
지방 소도시의 시민들은 가시적으로 확인가능한 지역사회 속에 정주하여 살아간다. 개인의 삶과 운명을 지역사회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힘들다. 지역사회 속에서 개인의 익명성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지역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우리가 남이가~”, “우리끼리” 가 될 것이다. 특히 수도권과 비수도권은 이런 차이가 극명하다. 만약 태생적으로 지역사회에 속해 있던 경우가 아니라면,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고 안 되고는 개인의 의지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대신 기존 지역사회의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다. 일종의 객관적 기준이나 자격요건 같은 것보다, 지역사회가 품고 있는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일상적이고도 정서적인 수용이 더 중요하다.
개인의 삶을 놓고 보아도 삶의 방식은 유랑형과 정주형을 오간다. 어릴 적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정주형의 삶을 산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삶의 방식이 유랑형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춘의 특성 때문이다. 삶의 기반이 수시로 바뀌고, 일상을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자주 바뀐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사회활동에서 점점 멀어진다. 동시에 삶의 방식도 정주형으로 바뀌어 간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어느새 우리 사회의 삶에 대한 기대수준이 현격하게 높아졌다. 더 이상 단칸방에서 달랑 수저 두 벌 놓고 신혼살림을 시작하던 시대가 아니다. 승가사회도 이런 추세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어딘가에 기대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이제는 나이도 먹었다는 걸 실감한다. 몸도 고장났고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왠지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이 몰려온다.
21세기 인류인 나는 인터넷으로 부평초를 본다. 수생식물인 부평초는 이름처럼 물 위를 여기저기 떠다니며 유랑한다. 그러나 물 속으로 내린 뿌리는 아주 길다. 스스로 자기 중심을 확실하게 잡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뒤집어지는 일이 없다. 물이 고요하건 거칠건 상관하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겨서 시절 인연을 거부하지 않는다. 게다가 부평초로 많이 알려진 개구리밥은 의외로 다년생이다. 혹독한 겨울도 거뜬히 견딘다. 정약용 선생은 수면 아래 부평초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김광석은 혹독한 겨울도 견디는 부평초의 강인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유랑형 인생은 부평초 같은 것으로 비유되는 반면 상식은 한 곳에 뿌리내린 정주형의 삶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가이다. 인생은 부평초 같은 것이 아니다. 인생은 부평초 같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