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정치, 희망의 정치 - 고성혁 시인
2024년 02월 07일(수) 00:00
1988년 봄 시장실에 근무할 때였다. 평화민주당 국회의원 후보자와 추종자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며 현직 동장의 넥타이를 말고삐처럼 끌고 시장실로 들어섰다. 절망했다. 지금의 민주당이 그때와 같다. 허청 기둥이 측간 기둥을 흉본다고 상대의 잘못만 탓하는 민주당이 갈수록 망하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 ‘원칙과 상식’ 의원들이 탈당하자 민주당 국회의원 129명이 이낙연 전 대표와 같은 ‘부류’로 몰아 공개적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소가 웃을 일이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은 대표는 전 대표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후 ‘방탄 국회’라는 비아냥거림 속에서도 권리당원의 투표비율을 늘렸다.

결국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지금껏 침묵하던 민주당에 ‘찐명 경쟁’과 더불어 비명 텃밭에 친명 자객을 푼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떠돈다. (원고를 보내려는데 통합형 비례정당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떴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그런데도 내부의 불통과 모르쇠에 입을 다물고 있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당을 위한 충정어린 충고는커녕 옳은 말을 한 사람들을 비난하다니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게다가 ‘광주·전남 선출직 공직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분열’이 아닌 ‘통합’의 길을 가라고 했다”면서 “작금의 상황은 김대중 정신과 어긋나는 길이며 민주당 정신을 저버리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이 오도록 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당내 다양한 의견을 통합하지 않고 방치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들만 모른단 말인가? 이게 다양성을 녹여 새로운 정책과 방향을 제시해야 할 공당의 옳은 자세란 말인가. 일관된 의회 민주주의 신봉자로서 자신을 죽이려한 박정희와 전두환까지도 협상의 상대로 인정한 김대중과, 우리 정치에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으로 새로운 정치 지평을 연 노무현의 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역시 혁신은 없었다. 귀를 닫으니 마음의 문도 닫힌 것이다. 지금껏 꿀 먹은 것처럼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온갖 멸칭 속에서도 혁신을 외치던 의원들을 기회는 이때다, 비난하는 것,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동참하지 않았는가? ‘이재명 팔이’를 일삼았던 사람, 자칭 이재명 대표의 호위천사라고까지 했던 호남의 국회의원들을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의 그런 이유도 짐작한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별의 ‘헤어질 결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걸 보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호남은 나라가 힘들 때마다 위기 극복에 앞장서 왔다. ‘약무호남’의 왜란 때도, 경술국치의 항일 의병 때도, 일제 강점기의 광주학생의거 때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신은 5·18 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김대중과 노무현을 통해 민주주의의 성지라는 꽃을 피워 올렸다. 지금 호남의 정치는 무풍, 무답, 무망의 ‘3무’만 무성하다. 인물도 비전도 정책도 없다. 이대로 가면 호남정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조현철 교수의 말대로 이재명 대표는 견리망의(見利忘義)와 견리사의(見利思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호남의 정치인들은 사즉생과 생즉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김대중 정신의 본질이고 김대중 같은 큰 정치를 시작하는 길이다. 노무현은 멋지게 진 아름다운 바보라서 호명되었고, 김대중의 이름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생활, 두 차례의 망명과 55번의 가택연금에서 비롯되었다. ‘길 위에 김대중’을 봤는가? 그렇다면 헛눈으로 본 것이다. 제발 두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1988년의 그때 나는 평화민주당에 대한 배신감으로 사실관계를 담은 A4 용지 일곱 장의 고약한 편지를 썼고 그 때문인지 그 국회의원은 얼마 뒤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저 반사적 이익만을 기다리다간 몰락만 있을 뿐이다. ‘한나땡’(한동훈 나오면 땡큐)이라더니 거꾸로 한동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치판을 흔들고 있다. 2022년 관리재정적자는 117조였고 2023년은 67조, 올해는 92조에 이른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극심하게 왜곡되었고 남북 간 긴장은 터질 듯 고조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 희망의 정치로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한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호남의 정치인들은 하나로 뭉쳐 구태와 악습을 혁파하여 당을 구하라. 혁신 없이는 총선도 대선도 없다. 제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다 부러진 나무 등걸에 맞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지 않기를 간곡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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