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 ‘문불여장성’이 낳은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 깃들어
2022년 05월 23일(월) 00:30
해동 18현 김인후와 사위 고암 양자징 학덕 기리기 위해 건립
전학후묘 구조, 전면에 학당 위치하고 후면 제사 지내는 공간
‘확연루’ 현판은 송시열 글씨, 경장각에 ‘인종 묵죽도’ 목판도

장성 필암서원은 해동 18현 가운데 한 명인 하서 김인후의 학덕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도학, 학문, 절의…. 그 선비를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말이다. 학문과 절의, 문장을 갖췄다는 것으로 그는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장이, 학문이 장성만 못하다는 말이 상당 부분 그에게서 연유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을 일컫는다. 그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가운데 한 명이다. 물론 하서 김인후 외에도 장성에는 노사 기정진, 망암 변이중 같은 유학자들이 적지 않다. 모두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다.

1796년 김인후의 시호를 ‘문정’으로 추증한다는 정조의 교지.
김인후는 1510년 장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후 1540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세자의 시강원 (侍講院) 설서(說書)로 임명돼 후일 보위에 오르는 인종을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필암서원은 김인후와 그의 사위 고암 양자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당초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지만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돼 1624년 다시 지어졌다. 이후 1662년 현종이 어필로 ‘필암서원’이라고 사액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필암서원에 늦봄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쬔다. 황홀한 빛이다. 어쩌면 마지막 봄볕이려니 싶다. 붓바위라는 뜻의 필암(筆巖)에선 상서로운 의미가 배어나온다. 배움의 세계만을 상정한다면 필암은 여느 서원과 별반 다르지 않을 터다. 그러나 하서의 천품이 곧고 담백해 학문에서도 그 됨됨이가 읽혀진다.

하루 한날치고는 햇살이 무척이나 종요롭다. 소만(小滿)을 전후한 때이어서 그런가 싶다. 햇살이 풍부하다 못해 남실거린다. 24절기 중 여덟 번 째인 소만은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절기이다. ‘작게 가득찬다’라는 소만의 뜻이 말해주듯 소박하지만 넉넉하다.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내부.


황색의 고장답게 들판의 보리도 알맞게 익어 누르스름한 빛을 띈다.

햇살은 잘 데워진 황토처럼 노란빛이다. 옐로우 브랜드를 내세운 장성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룬다. 소만의 기운이 달아올라 세상의 모든 것이 순리대로 담담하게 익어갔으면 한다.

그렇게 황색을 보면 일단 마음이 놓인다. 널을 뛰는 듯한 감정도 가라앉고 허허로운 상념에 치닫던 생각의 결도 정돈되는 느낌이다. 쭈뼛하게 솟은 보리이삭의 빛에서 곧 다가올 맥추(麥秋)의 결실이 기대된다. 가을에만 추수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름 초입에서 지나온 반 년의 시간을 숙고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던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와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이 배향된 필암서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답게 은은한 기품이 감돈다. 언급한 대로 하서는 절의, 지조가 남달랐다. 요즘말로 공부만 잘했다(학문이 깊었다)고 추앙을 받는 것이 아님을 전제한다.

필암서원 정원에 있는 정자 삼연정.


역사적으로 중종과 인종 시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곡학아세(曲學阿世)로 시류에 편승할 수 있었지만, 하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중종대 벌어졌던 기묘사화 광풍의 여진이 남아 있던 무렵이었다. 김인후는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신원시켜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홍문관 부수찬이었던 그는 언관(言官)으로서의 임무를 회피하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을 사면해달라는 직언을 가감없이 했던 것이다. 곧은 성정의 하서는 단순히 관료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하서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다. 인종이 보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그는 모든 관직을 내려놓는다.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돤 연유다. 명종이 즉위한 이한 몇 차례 벼슬을 제수했지만 그는 병을 이유로 고사한다. 관직보다 인간적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무릇 학문의 본질은 지식에 있지 않고 실행에 있다는 사실을 하서는 몸소 보여줬다.

하서의 생애 등을 기록한 김인후 신도비.


필암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에 학당이 위치하고 후면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 서원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확연루(廓然樓)다.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한 말인데 ‘확연루기’에 따르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히 공평무사 하다’는 뜻이다. 군자가 임하는 학문의 태도를 일컫는 말로, 우암 송시열(1607~89)의 글씨다.

청절당(淸節堂)은 유생들의 강학 공간이다. 옛 진원현 객사를 옮겼다고 전해지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이곳 명칭은 송시열이 쓴 하서 선생 신도비문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귀에서 따왔다. 특히 처마 밑의 필암서원 현판은 사액을 뜻하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돼 있으며, 병계 윤병구의 글씨다.

필암서원에는 여느 서원과는 다른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경장각(敬藏閣)이다. 정조가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내린 하사금으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인 하서에게 하사한 ‘주자대전’ 한 질과 손수 그린 ‘묵죽도’ 목판이 보관돼 있다. 묵죽도에 담긴 대나무의 곧은 성품과 강직함은 김인후의 천품을 여실히 보여준다.

필암서원과 지척인 맥동은 하서가 태어난 마을이다. 산기슭에 ‘筆巖(필암)’이라 새긴 바위가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붓을 닮은 바위로 인해 대학자가 난다는 풍수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맥동마을을 감싸안은 산의 아늑한 형세에서 문필봉을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 하서의 생가 터에는 백가지 꽃이 핀다는 의미의 백화정(百花亭)이 있다. 묵향의 분위기와 고즈넉함이 어울려 옛 정취가 그만이다. 하오의 햇살이 내리쬐는 백화정에서 조선의 선비이자 호남의 선비인 하서의 생애와 학문을 잠시 가늠해본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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