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설픈 논객이 부르는 마지막 노래
2022년 03월 02일(수) 23:00
그동안 대통령만 해도 모두 열 명이나 겪었다. 그 긴긴 세월을 어찌 버티며 여기까지 왔을까. 분명한 것은 한시도 해찰하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는 것이다.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이었으니 햇수로 45년. 거의 반세기를 기자로 살아온 셈이다. 그렇게 해서 아마도 ‘호남 지역 최장수 언론인’의 타이틀을 얻은 것 같긴 하다.

하나 돌아보니 순탄한 세월만은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시련도 있었고 견디기 힘든 고초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5·18은 ‘풋내기 기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사건이었다. 그때 만났던 여고생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위대에 여고생까지 참여’- 당연히 인적 사항 확인에 들어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쓰지도 못할 거면서 이름은 왜 물어요? 그러고도 기자예요?” 여학생의 그 말은 이후 나를 계속 괴롭혔다. “나는 과연 기자인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광주 엠비시가 불타던 그날 밤도 잊지 못한다. 어둠이 깔린 골목에서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고꾸라졌다. 공수부대원의 곤봉을 맞은 그 청년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홍안과에서 나온 우리(선배기자와 나)는 슬금슬금 걸어서 단골식당 골방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쫓아온 공수부대원이 식당 아줌마에게 ‘방금 들어온 젊은이들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우리는 하릴없이 골방에서 나와 계엄군의 곤봉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태희·나의갑·이홍재 등 전남일보 기자와 박옥재 경향신문 기자, 홍건순 동아일보 기자 등은 취재 과정에서 계엄군한테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기도 했다.” 당시 함께 취재했던 선배 기자 나의갑은 지난해 펴낸 ‘전두환의 광주폭동이라니요?’란 책에서 이 같이 기술하고 있다.

책에는 ‘박관현 묘소 사건’에 대한 간략한 언급도 나온다. “이 사건은 이홍재 기자가 1982년 11월12일 자 광주일보 ‘내 고장 주말’이라는 연재물 ‘불갑산’ 편에서 ‘오른쪽 산허리에 보이는 박관현의 묘소를 뒤로하고’라고 썼다가 기관에 잡혀가 혼났던 사건이다.”

불면의 밤 많았지만 행복했다

그 무렵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관현은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사망했었다. 당국은 박관현의 시신을 탈취해 아무도 모르게 영광 땅에 묻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나는 이를 기사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와 동료 기자는 ‘정보기관에 끌려가면 뼈도 못 추리고 나올 수 있다’며 간곡히 만류했다. 무서웠다. 박관현의 이름 뒤에 ‘열사’는커녕 존칭인 ‘씨’ 자 하나 붙이지 못한 까닭이다.

신문에 기사가 실린 다음 날 편집국장이 부르더니 “전일다방 옆 골목에 손님이 와 계시니 만나 보고 오라”고 했다. 낌새가 이상했지만 설마 하며 나갔다. “타시지요.”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나를 승용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승용차가 화정동 안기부 정문을 넘어서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야 섀끼야. 아까 같이 또 한 번 자때바때해 봐라.” 승용차 뒷좌석에서 수사관 두 명 사이에 끼여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몸을 뒤로 젖혔던 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자때바때’로 비쳤던 모양이었다.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가 안기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당시엔 나를 기관에 순순히 내준 편집국장이 많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해는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회사의 존속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던 전두환 독재 시절이었으니까.

아무튼 그곳에서 곤욕을 치른 뒤 ‘여기서 있었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친하게 지냈던 동료 기자 한 명이 백로지에 적힌 장문의 시 한 편을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기관에 끌려가 있는 동안 괴로운 심정으로 밤새 통음을 하며 쓴 시라고 했다.

“내 친구는 갔다/ 내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당당히 갔고/ 나는 계속 취하고 싶다/ 친구여 내가 아침부터 취할 수밖에 없음을/ 네가 맞는 채찍의 맛으로 알아 다오/ 친구여 많이 맞아라/ 맞고 침묵의 분노 방점 찍어라” <당시 한송주 기자의 시 중 일부>

나는 그의 말대로 한동안 침묵의 분노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 2년쯤 지나 용기를 내서 나도 시 한 편을 끄적거려 보았다. 여전히 무서웠지만 그들이 ‘시를 어찌 알랴’ 하는 생각에 사보(社報)에 기고하는 만용까지 부렸다.

“네가 기자냐 허허/ 기는 것이 기자다 허허 허허/ 이제는 거둬야 할/ 저 허허로운 웃음, 처절한 미소/ 이제는 되찾아야 할 빼앗긴 자존(自尊)// 심장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화정동 고개 넘고 또 넘어/ 닳고 닳은 발부리 부르터져도/ 정의의 붓끝이야 문드러질까” <졸시 ‘우리들의 꽃’ 중 일부>

호남 최장수 기자로 파란만장

생각해 보니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정보기관과 세 번이나 악연을 맺었다. 첫 번째는 박정희 독재 시절 농촌의 피폐한 모습을 핍진(逼眞)하게 묘사했다가 연재물이 중단되었던 사건이다.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두 번째는 ‘해방신학’ 강연회 취재를 저지당한 사건이다. 나중에 들어 보니 경찰은 내가 만세를 부르고 난동을 부렸다고 안기부에 일러바쳤다고 했다.

세 번째는 앞서 언급한 ‘박관현 사건’인데, 나는 내근으로 좌천되고 당시 부국장(허광욱) 역시 문제의 기사를 걸러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봉 조치를 당했다. 참 엿같은 세월이었다.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특종을 해 놓고도 정치권력에 의해 소송을 당해 2년 가까이 맘고생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럼을 쓰면서는 늘 행복했다. 물론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이 많았다. 하지만 칼럼이 나가고 나서는 뿌듯했으니 수많은 독자들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자나 전화로, 또 누군가는 손편지까지 보내 주며 과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이는 내 칼럼이 나오면 복사를 한 뒤 코팅까지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고 했다. 내 글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독자도 있었다. 그만큼 감동했다는 뜻일 터이니 최고의 상찬(賞讚)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어설픈 논객’이었다. ‘잉크가 아닌 피로써 글을 쓰는’(니체) 뛰어난 논객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정연한 논리를 펴는 날카로운 논객이 되기에는 너무나 자질이 부족했다. 이를 일찍이 자각한 나는 그저 독자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칼러테이너’(columnist+entertainer)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글쓰기 3대 원칙’만은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첫째, 쉽게 쓰고 둘째, 재미있게 쓰며 셋째, 반드시 약간의 지식과 정보를 곁들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재미’는 내가 가장 중요시한 요소였다. 물론 꼭 써야 할 그때그때의 이슈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쓴 크고 작은 칼럼이 족히 1000편도 넘지 않나 싶다. 애써 읽어 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기자여서 참 행복했다. 돌아보니 내 비록 한평생 결곡한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는 없으되 제법 치열하게는 살아온 것 같다. 다행히도 권력의 억압에 굴하지 않았고 금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할 것인가? 안 한다. 왜? 너무 힘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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