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피는 꽃
2022년 02월 22일(화) 00:45
식물은 어쩌면 알람 기능이 있는 시계인지도 모른다. 수십 년 동안의 휴면기나 혹독한 겨울나기를 거친 후에 어김없이 꽃이나 싹을 피우는 모습은 경이롭다. 잠든 씨앗이나 식물을 깨우는 알람은 무엇일까?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신혜우 박사(식물분류학)가 쓴 ‘식물학자의 노트’에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싹이 튼 희귀 북아메리카 난초 이야기가 나온다. 연구자인 데니스 위검 박사는 북미 자생지 여러 곳에 난초 씨앗이 담긴 주머니를 심어 두고 발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난초 씨앗은 유사한 생육 환경에서도 쉽사리 싹을 틔우지 못했다. 딱 한 곳에서 15년 만에 난초 싹이 텄다.

연구를 해 보니 싹을 틔운 조력자는 곰팡이였다. 난초 씨앗은 워낙 크기가 작아 발아할 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씨앗 속 조직인 ‘배유’(胚乳)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난초는 스스로 싹을 틔울 수가 없는데 곰팡이가 영양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 끝나기도 전, 이르게 눈 속에서 피는 매화도 신비롭다. 언론학자이자 소설가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장편소설 ‘눈속에 핀 꽃’(2018년)에서 조선 후기 여류 시인 유한당(幽閑堂) 홍원주의 한시 ‘매화’를 소개한다.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대학시절 첫 사랑의 화장(火葬) 소식을 들은 주인공이 먹을 갈아 한시를 쓰는 대목이다.

“홀로 이른 봄빛 누리더니(獨擅春光早)/ 성긴 가지, 달을 띠고 기울었다(疎枝帶月斜)/ 바람 따라 은은한 향기 날린다(隨風暗香動)/ 옥같은 나무, 눈 속에 핀 꽃(玉樹雪中梅)”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적 상태가 고스란히 투영된 듯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3년째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며칠 전 내린 눈 속에서도 이곳저곳에서 꽃이 피었음을 알리는 화신(花信)이 전해져 왔다. 나주에 납매(臘梅)가, 순천에 홍매(紅梅)가, 구례에 복수초(福壽草)와 설강화(雪降花)가 피었다.

그러니 이제 봄은 멀지 않았다. 책상에 올려 둔 수선화 화분도 며칠 전 환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슬며시 밀려오는 봄기운에 맥을 못 춘 코로나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워 주었으면 좋으련만.

/송기동 문화2부장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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