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는 어떤 도시에 살 것인가?
2022년 01월 12일(수) 08:00
걷고, 만나고, 이야기가 있는 도시에서 살고 싶다
차량 중심의 도시정책 도심 활력 저하…보행 친화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만남 풍부한 도시가 성공한 도시…경제발전 넘어 사회적 유대·협동 필요
역사성 담긴 오랜 원도심은 ‘이야기 보물창고’…주민이 주연, 행정은 조연

뉴욕 맨하탄 헤랄드광장 옆 브로드웨이를 막아 소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7) <김기호 교수 제공>

“당신은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새해 벽두부터 너무 어려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좀 쉽게 생각해 ‘내가 사는 도시는 무엇이 좋고, 또 무엇이 아쉽지?’라고 자문해 보면 된다. 어쨌거나 사람마다 가치와 기준이 달라 쉽게 답이 모아질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그래도 몇 개를 꼽는다면 무엇일까? 도시계획이 전공으로, 평생 세계 여러 도시를 둘러보고 도시계획 및 설계에 참여해 온 필자는 다음 세 가지를 ‘살고 싶은 도시’의 중요한 요건으로 들고 싶다. ‘걷고 싶은 길이 있는 도시’, ‘만나고 함께 가꾸는 도시’, ‘이야기가 있는 도시’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하며 살고 싶은 도시로 떠나보자.

먼저 매슬로우(1908~1970)의 ‘인간의 기본적 요구 피라미드’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것을 원하는 것(살고 싶은 도시)은 어떤 요구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자인 그는 ‘동기부여 이론’(1943)에서 사람의 요구는 변화하며 그에 따라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짐을 설명했다. 1~2 단계는 기초적 요구로서 물질적 만족이 주를 이루며, 3~4단계는 심리적 요구로 사회적 만족을 추구한다. 마지막 5단계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 창조적 행위를 하고 심미적 만족을 얻는 것이다.

광주는 지금 ‘인간의 기본적 요구’ 피라미드에서 어느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소득 3만 불 이상이 된 우리가 원하고 지향해야 하는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가 주관한 주민이 가꾸는 가로변 마을 텃밭. (2012·종로구 교남동)
#‘걷고 싶은 길이 있는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다.

도시 발달은 무엇보다 길을 통해 이뤄진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로마제국 번영을 한 마디로 나타내 주는 동시에 도시발전에서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말해준다. 근대화와 산업화 이전에는 보행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9~20세기 기차와 자동차 발명 이후 인간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전차, 자동차의 사용은 도시 크기를 보행도시보다 훨씬 크게 만들었다. 산업화와 함께 인구도 급격히 증가해 도시는 사람과 차량 모두 고밀화됐고 차량과 보행사이에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도시정책은 경제발전 목표에 주목하며 차량 소통에 집중해왔다. 보행자들은 비인도적(非人道的)인 좁은 인도(人道)를 이용하거나 아예 인도 없이 차량과 뒤섞여 길을 이용해야하는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다. 한 때 경제발전과 차량속도를 위해 차량을 우선하고 보행을 소홀히 한 정책은 결국 차량속도도 높이지 못하고 도심가의 활력만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에 더해 도심은 교외개발로 퇴락하기에 이르렀고 도심을 살리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현재 세계적으로 검증된 확실한 대책은 도시의 길을 보행 친화적으로 만들어 시민들이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뿐이다. 도심에는 시민들의 자부심과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역사적 건물이나 가로가 있고, 시민들이 기억 속에 공유하는 친근한 장소들이 있다.

도시를 걷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세계 많은 도시들이 관행과 제도를 바꾸고 있다. 뉴욕 맨하탄의 브로드웨이는 차로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인도를 넓히고 때로는 도로를 아예 막아 작은 공원을 만들어 사용중이다.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시 보행조례 제정’(1997), ‘보행환경기본계획’(1998) 수립 이후 2000년대 초 시청 앞 광장을 보행광장으로 만들었고 청계천 복원 및 도심보행환경 개선도 진행했다. 2010년 보행·자전거과(課) 설치 후 2015년 위상을 국(局)으로 높인 보행친화기획관을 설치했으며 2013년에는 ‘보행 친화 도시 서울 비전’을 제시했다.

이제 뉴욕과 서울 도심지는 다시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40년 이상 도심 가로를 보행전용으로 바꿔 온 코펜하겐은 보행전용로의 길이가 6배로 증가하고 도심 상권이 활성화돼 ‘환경친화적인 걷고 싶은 가로’로 시민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광주송정역 시장 벽에 적힌 많은 이야기들의 단서들, (2017)
#‘만나고 함께 가꾸는 도시’가 살 보람 있는 도시다

도시는 사람들이 만나고 교역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정보를 교환하고 물건을 교역하며 도시가 성장했다. 한마디로 사람들 만남이 풍부한 도시는 발전하는 도시며 그렇지 못한 도시는 쇠퇴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경제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 유대나 협동 등 사회 발전에도 결정적이다. 현대 도시는 인구가 많아 만남이 쉽고 빈번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여러 연구의 결과다. 이럴 때일수록 인구만 많고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그 속에 다양한 도시마을들이 있는 도시가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 사는 데 유용하다. 큰 길보다는 작은 길이 더 만남을 유발하는 데 우호적이고 자동차보다 보행이 친밀한 만남을 늘리고 지속하는 데 유리하다.

‘인간의 기본적 요구’ 피라미드 중 세 번째 요구인 소속감이나 친밀감, 지역 사랑은 바로 도시 내 사람들의 만남에 관한 것이다. 어떤 동네 사람이라는 소속감, 어떤 단체나 동아리의 구성원 이라는 자부심이야말로 자기 마을이나 지역을 사랑하는 바탕이 된다.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소속감이 약화됐다고 하지만 지역사회는 여전히 동네 이웃친구들과 학교동창 등이 기반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이 만나는 또 하나의 장소다.

이런 관계나 활동들이 자기가 사는 동네의 환경개선이나 축제 등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전문 인력이나 예산 등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시청이나 구청이 투명성과 개방성을 갖고 주민들과 협치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주민참여는 단순히 다음 선거를 위한 정치인의 표 관리차원이나 행정의 업적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주민들이 협동을 통해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야한다.

쉽게 이야기해 주민이 주인공이고 정치인이나 행정은 조연을 해야 한다. 이 관계가 거꾸로 돼 주민들을 정치와 행정의 들러리로 전락시키면 주민들의 참여의욕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주민들은 이제 어느 시장이나 구청장이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하는 길이나 공원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함께 이뤄낸 길과 공원을 자랑스럽게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 도시는 결국 시민의 것이다.

주인 사망 후 14년간이나 무덤을 지키다 죽은 충견 그레이프라이어스 바비를 기념하는 분수와 주변 식 당 . (2017 영국 에딘버러)
#‘이야기가 있는 도시’가 살맛 나는 도시다.

도시는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지역성이 넘치고 독특하며 인간적이다. 원 도심에는 이야기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우리가 가던 책방, 식당, 상가 그리고 즐겨 걷던 길, 내가 연인을 만나던 언덕이나 카페 등 모든 곳이 바로 나와 우리, 부모, 조부모의 삶이 묻어 있는 장소며 도시이야기의 줄기세포다.

이야기는 우리에게만 머물지 않고 때로는 화가, 소설가, 드라마제작자 등에 의해 그림, 시나 노래,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공유하게 된다. 많은 독자나 시청자가 이야기 배경이 된 도시와 장소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이야기의 감동을 현장에서 작가나 주인공의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는 방문객이 너무 넘쳐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민들은 자기 도시와 장소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장소마케팅이니 관광수입 증대니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세상에 사람 사는 곳치고 이야기가 없는 곳은 없다. 다만, 이야기들이 발굴, 정리돼 여러 사람이 공유하고 감동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공유하는 이야기가 없거나 또는 빈약한 도시는 정말 황량하고 재미없는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도시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중요하다. 대규모 유적복원도 중요하지만 과거와 현재 이 도시를 살아가는 많은 민초들의 소소한 삶도 중요하다. 역사는 많은 사람들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어떤 사람은 글로, 또 어떤 사람은 그림이나 노래로 도시와 장소의 영혼을 불러 와 현재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한 작가 또는 영화 하나가 어떤 도시의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은 미디어 시대와 함께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1991) 속의 파리는 어떤가? ‘태백산맥’속의 벌교나 낙안은 또 어떤가? 감동적인가? 한 번 그 현장에 가 보고 싶은가? 광주는 또 어떤 이야기를 통해 매력을 드러낼 것인가? 아무리 환경조성이 잘 돼도 이야기 없는 길이나 광장은 공허하며,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도 그 배경이 되는 장소가 개발로 철거됐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매우 부족하다. 크거나 작거나 역사적 장소 보전이 중요한 이유다.

이렇게 이야기를 좇아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우리는 관광이라고 한다. 우리가 해외여행 가서 열심히 걷는 길은 바로 한 도시의 역사와 오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김기호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행복도시 총괄계획가

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대표

전 서울특별시 명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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