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이 약 한번 잡숴 봐! 최규진 지음
2021년 12월 11일(토) 19:00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입 코 덮개’를 착용했을까?
우리나라에 마스크가 등장한 것은 1919년이었다. ‘매일신보’가 ‘악감’(악성 감기) 예방을 위해 양치질과 마스크 착용을 권했다. 당시 매일신보(1919년 12월 26일) 삽화에는 마스크를 ‘입 코 덮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열악한 나머지 일본보다 마스크 쓰는 사람이 훨씬 적었다.

프랑스 지식인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는 글보다 전염성이 강하고 바이러스성을 띤다. 이미지는 신념 공동체를 땜질하듯 녹여 붙이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지가 공동체의 가치를 전파하고 결속하는 기제라는 의미다.

근대 풍경을 광고 이미지를 통해 들여다 본 ‘이 약 한번 잡숴봐!’는 이색적인 책이다. 한마디로 약 광고로 들춰 본 일제강점기 생활문화사로, 저자는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최규진 연구교수다.

저자는 10년 이상 근대 시각 자료에 천착했다. 이번 책은 “오직 시간을 들여 낱낱이 사료를 살펴야만 하는 고된 작업” 끝에 나온 의미 있는 결과다. 단순히 검색만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시간과 눈 공(功)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활명수 광고 (조선일보 1929년 7월10일)
약은 우리의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약과 결합된 광고는 ‘이데올로기’를 끼워 파는 속성을 지닌다. 책에는 비문자 사료를 매개로 풀어낸 일제강점기 시대상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광고는 ‘고백’이라는 말로 쓰였다. 1886년 2월 22일 세창양행이 ‘고백(告白)’, 즉 광고를 한 것. 1860년대부터 일본에서 쓰기 시작한 광고(廣告)라는 어휘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고백’을 광고 뜻으로 쓴 것은 한·중·일 3국의 공통 현상이었다.

책에는 풍부한 근대 풍경이 소환된다. 마스크에서 생리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이상의 소설 ‘날개’에 나오는 아달린, 월트 디지니의 미키마우스까지 소개된다.

당시 의약품을 취급하는 이들은 신문과 잡지에 광고 게재뿐 아니라 “포스터, 선전지, 선전대, 옥외광고, 간판, 광고판 등 여러 방식으로” 제품을 홍보했다. ‘동아일보’(1930년 10월 15일)에는 영등포 철로변에 세웠던 ‘조고약’과 ‘천일영신환’ 광고판이 나온다. 1925년 3월 4일자 ‘조선일보’에는 광고지가 경성 거리를 뒤덮은 풍경을 그린 삽화가 등장한다. 오른쪽 아래 부분을 보면 광고지 아래 사람의 다리가 보일 정도다.

이러한 매체에 실린 광고 가운데 가장 많은 분야는 단연 약품이었다. “의약품이 58.5%를 차지하고 장신구 17.5퍼센트, 화장품 10.2퍼센트” 순이었다. 이 말은 근대 신문 잡지 면의 상당 부분이 의약품 광고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약품 가운데서도 어떤 품목이 가장 많았을까. “성병 치료제가 가장 많은 15.6퍼센트, 자양강장제가 13.5퍼센트, 소화기류가 8.8퍼센트”를 차지한 것에서 보듯, 당시 위생이나 질병의 관념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다.

1939년 6월16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비타민 C 광고. “미용과 영양에 우수한 효력”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서해문집 제공>
최음제와 관련된 제품 광고도 눈길을 끈다. 매일신보(1937년 10월 16일)에 게재된 ‘킹오브킹즈’는 “30분이면 흥분 상태에 빠지는 성욕 촉진제”라고 소개돼 있다. 다른 날짜 광고 지면에는 중국에서 내려오는 비법을 적용한 약으로 묘사돼 있다. “반절은 깨어 있고 반절은 취한 상태”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에로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

의약품과 관련 가장 큰 시장은 소화제 분야였다. 활명수는 대표적인 약이었으며 “궁중에서만 복용하는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게 널리 보급한다”는 목적으로 개발됐다.

소화기 질환과 연계된 약 가운데 ‘정로환’에는 사회적,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배가 아프거나 설사가 있을 때 먹는 약으로 당시 광고가 자못 특이했다. 그러나 ‘정로환’(征露丸)에서 ‘로’(露) 자는 러시아를 뜻했다. 당시 일간지에는 “정로환은 일로전역(러일전쟁)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제 발매된 위장, 폐, 늑막 등의 묘약”이라고 표현돼 있다.

저자는 “우리네와 똑같이 생로병사의 고뇌에 시달렸던 사람들, 그리고 ‘약의 잔치’에 제대로 초대받지 못했던 가난한 이들의 삶을 되새기며 인문학적 사유의 한 가닥을 가다듬어 보기를 권유한다”고 밝힌다.

<서해문집·3만3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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