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리옹과 뤼미에르 형제] ‘빛의 도시’ 리옹…‘빛의 마술’ 영화 탄생 뤼미에르 형제
2021년 10월 27일(수) 02:30
종교전쟁·흑사병 이겨내고자
노트르담 성당에 모여 특별기도
매년 12월8일 ‘빛의 축제’ 기원
도시 전체가 루미나리에 장식
‘빛’ 뜻하는 ‘뤼미에르’ 형제
‘시네마토그라프’ 영사기 특허

뤼미에르 형제. 왼쪽이 형인 오귀스트이고 오른쪽이 루이. <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빛의 도시가 광주라면, 프랑스에는 리옹이 있다. 매년 12월 8일을 전후해 나흘간 계속되는 빛의 축제가 시작되면 온 도시가 화려한 조명에 휩싸인다. 리옹의 상징인 여러 건축물이나 광장들이 루미나리에 장식으로 한껏 뽐을 내고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람객을 맞는다. 리옹이 빛의 도시가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리옹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푸르비에르 언덕에 성모에게 바치는 성당이 지어진 게 1168년이다. 푸르비에르 노트르담은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가 벌인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562년 폐허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옹 사람들은 이 성당을 복원했는데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 다시 도시에 위기가 찾아왔다.

프랑스 남부를 휩쓸던 흑사병의 그림자가 리옹에도 드리운 것이다. 매일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상황에 놓인 리옹 시민들은 1643년 9월 8일 푸르비에르 노트르담 성당에 모여 성모 앞에서 전염병 퇴치를 위한 특별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9월 8일은 마리아의 탄생일이다. 흑사병이 사라진 뒤 리옹 사람들은 매년 9월 8일이면 리옹 시내 성요한 대성당에서 출발해 푸르비에르 언덕의 노트르담 성당까지 기도를 하며 행진하는 대규모 행사를 벌였다.

매년 12월 8일을 전후해 나흘 동안 열리는 빛의 축제 때 리옹의 야경. 이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이 다녀간다. <위키피디아>
9월 8일이던 리옹의 성모 축제일이 지금과 같이 12월초로 옮겨진 것은 19세기 중반 들어서의 일이다. 1852년 리옹교구는 새 성모상을 제작해 축제일인 9월 8일 푸르비에르 노트르담의 종탑에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리옹을 가로지르는 손강의 수위가 너무 높아 행사를 제때 치를 수 없게 됐다. 새롭게 결정된 제막식 날짜는 정확히 세 달 이후인 12월 8일이었고 축제를 성대히 치르기 위해 대대적인 불꽃놀이를 준비하고 주민들은 횃불을 붙여 온 도시를 밝히기로 했다.

그런데 폭풍우가 불어 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고 밤이 돼 폭풍이 잦아들자 행사를 진행한 시민들은 밖에서 볼 수 있도록 창문 앞에 조그만 촛불을 진열하는 것으로 횃불을 대신했다.

이 일이 있은 뒤 해마다 12월 8일이 되면 시민들은 창문에 촛불을 밝혀 마리아의 무염시태 축일을 기념했다. 현대에 들어 1989년부터 리옹시는 매년 12월 8일 도심의 주요 장소에 환한 조명을 켜고 온 도시를 횃불로 밝히던 전통을 이어갔다. 시민들은 물론 각자의 집에서 촛불을 켜고 창문 앞에 두는 방식으로 기념일을 챙겼다. 1999년부터는 12월 8일부터 나흘 동안 빛의 축제를 열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12년에는 무려 400만 명이 다녀갔다. 프랑스 빛의 도시인 리옹이 빛고을 광주와 인연을 맺었음직한데 리옹의 자매결연 도시 리스트에 한국의 도시명은 없다.

‘빛’을 뜻하는 프랑스어는 뤼미에르(Lumiere)인데 공교롭게도 리옹은 다른 의미에서 빛의 도시이기도 하다. 바로 영사기를 발명한 뤼미에르(Lumiere) 형제의 이야기다. 발명 이후 영화관이 대중화되면서 영화는 비로소 산업이 됐고, 제 7의 예술의 지위를 획득하게 됐다. 리옹의 가장 큰 두 연중행사에는 철자까지 같은 이 단어, ‘빛’이 꼭 들어간다. 12월 8일에 열리는 빛의 축제(Fete de Lumiere)와 10월 중반 열리는 뤼미에르 영화제(Festival Lumiere)다. 우연 치고는 기가 막히게도, 그 뤼미에르가 그 뤼미에르가 아니지만 어쨌든 리옹이 뤼미에르(빛)의 도시인 것만은 확실한 셈이다. 사람들은 뤼미에르를 보려고 리옹을 찾는다.

뤼미에르 연구소 정문. 세계 첫 상업영화인 ‘공장 노동자들의 퇴근’이 촬영된 곳이다.<위키피디아>
토요일이던 지난 10월 16일 리옹 8구의 프르미에 필름 가(街) 25번지 뤼미에르 연구소 정문 앞. 백발이 트레이드 마크인 네덜란드 출신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이 메가폰을 잡고 촬영을 진행 중이다. 캠피온 감독이 큐 사인을 내리자 퇴근 시간이 된 것처럼 연구소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현장은 유쾌한 분위기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장면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제대로 된 영화 마니아로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10월 16일은 제 13회 뤼미에르 영화제의 폐막일이고, 제인 캠피온 감독은 이날의 주인공으로 열 세번째 뤼미에르 상 수상자이다.

뤼미에르 영화제는 2009년 뤼미에르 연구소와 리옹시가 창립한 영화제인데 매년 공로가 큰 영화계 인물에게 상을 준다.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영화 인생 전반에게 수여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영화제와 차별화가 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이 상을 ‘영화계의 노벨상’으로 부르기도 한다. 역대 수상자는 초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비롯해 켄 로치, 쿠엔틴 타란티노, 카트린 드뇌브, 왕가위 등이 있다.

영광스러운 상을 탄 캠피온 감독이 축제의 마지막날 장난스럽게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이유는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뤼미에르 형제에게 바치는 오마주이다. ‘최초의 영화’라는 뜻의 연구소 주소부터 심상치 않다. 최초의 영화 촬영이 이뤄진 곳이 바로 이곳 뤼미에르 연구소 정문 앞이다. 지금의 연구소는 두 사람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필름 공장 부지였다. 영사기 발명에 성공한 그들이 최초의 상업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촬영한 장면은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캠피온 감독은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 첫 상업 영화를 찍었던 그 장소에서 똑 같은 장면을 찍는 것으로 ‘영화의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했다.

엄밀히 말해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영사기를 발명한 사람은 아니다. 대서양 너머 미국의 에디슨이 이들보다 몇 해 앞서 영사기를 만들었다.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조그만 구멍을 통해 영화를 보는 방식이어서 관람객이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파리 시내의 한 상점에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본 앙투안 뤼미에르는 두 아들 오귀스트와 루이에게 단점을 보완해보라고 제안한다. 이 문제는 신기술에 관심이 많은 전세계 발명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이기도 했다. 1895년 2월 이들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라는 이름의 기계에 대한 특허를 냈다. 에디슨의 기계에 비하면 훨씬 작아서 휴대가 가능할 뿐 아니라 외부 영사 기능을 통해 여럿이서 화면을 감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촬영도 할 수 있었다.

세계 첫 상업영화인 ‘공장 노동자들의 퇴근’의 한장면.<위키피디아>
동생인 루이 뤼미에르는 같은 해 3월 19일 자신이 발명한 시네마토그라프를 들고 아버지의 필름 공장 정문 앞으로 갔다. 일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을 촬영했다. 1분이 채 안 되는 세계 최초의 상업영화 ‘공장 노동자들의 퇴근’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도 매년 3월 19일이면 연구소 정문으로 나서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찍는 행사가 열린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 영화를 포함한 10편의 영화를 12월 28일 파리의 스크리브 호텔 지하 그랑 카페에서 상영했다. 관람료는 1 프랑. 이날 모인 33명은 세계 최초의 영화관 유료관객이었던 것이다. 관람객은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폭발적으로 늘었다. 상영관을 빌리기 위해 수십 곳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단 며칠 후 스크리브 호텔 앞에 2000여명이 몰려들어 경찰까지 배치됐다는 게 믿기 힘들 정도다.

뤼미에르 형제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당시 상영장소인 그랑 카페는 같은 자리에서 지금도 영업 중인데, 이름을 뤼미에르 카페로 변경했다. 이젠 고전적 방식으로 치부되는 영화관에서 유튜브를 지나 넷플릭스까지 영상매체의 발달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다만 그럴수록 리옹의 빛(뤼미에르)은 더욱 환하게 비칠 것이라는 점은 유추해볼 수 있다. 종교의 세력이 커질수록 성지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정상필 전 광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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