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사랑한 빅토르 위고, 작가 넘어 파리지앵의 상징
2021년 09월 29일(수) 00:40
<4> 프랑스 파리
문학적 성공 가져다준
1862년 출간 ‘레 미제라블’
‘대성당 ’생명력 불어넣은
‘노트르담 드 파리’
1885년 83세로 별세
프랑스 첫 문학인 국민장

위고가 살던 아파트 건물 대문 위에 작가의 조각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사후에 제작됐다. <Polymagou>

1885년 5월 22일 오후 파리가 들썩였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소년들이 호외를 뿌리며 호들갑을 떨었고, 대로변의 아파트 창문에는 공화국을 상징하는 삼색기가 걸리고 있었다. 간간이 검정색 조기도 눈에 띄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시인이 하늘의 별이 된 날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빅토르 위고를 애도하기 위해 그의 아파트 근처로 모여들었다.

파리 16구의 빅토르 위고 가(街) 124번지. 자신의 이름을 딴 길에 실제로 사는 영광을 누리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댈로 가’였던 길은 1881년 ‘위고 가’로 명명됐다. 위고가 해당 아파트에서 산 것은 1878년부터였는데 자신의 79세 생일 다음날 길 이름이 바뀌었다. 생일 선물 치고는 꽤 폼나는 선물을 파리시가 선사한 것이다.

위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위고 가 124번지 앞은 파리 시민들이 준비한 조화가 산을 이뤘다. 그들은 슬픔에 찬 표정으로 “빅토르 위고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이름을 외치며 집 앞을 지키는 장면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80세 생일이던 1881년에는 60만 명의 시민들이 그의 집 앞에 운집했다. 앞서 1870년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19년 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위고를 맞이한 것 역시 북역 앞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파리 시민들이었다.

1885년 6월1일 열린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 운구행렬은 개선문에서 출발해 팡테옹으로 향했다. <위키피디아>
파리가 위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끝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나 그의 장례식이다. 당시 하원에서는 418표 중 찬성 415표라는 압도적 투표 결과로 위고의 국민장을 결정했다. 위고는 자신의 부모와 두 딸이 이미 잠들어있는 페르-라쉐즈 공동묘지의 가족 납골당에 가길 원했지만, 파리 시민들은 그를 계획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위고의 시신은 팡테옹에 안치될 예정이었다. 사망 이후 일주일 남짓이 지난 6월1일 장례식이 거행됐다. 문학인을 국민장으로 치르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초대형 상여는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가인 샤를 가르니에가 만들었다.

운구 행렬이 잘 보이는 대로변의 아파트 발코니는 비싼 가격에 임대됐을 정도라고 한다. 학교들도 임시 휴교 조치를 내렸다. 이날 모인 파리 시민은 100만~200만 명에 달했다.

위고가에 있는 빅토르 위고와 그의 뮤즈들(1909년). <위키피디아>
파리가 위고를 사랑했던 것은 단지, 그가 대표작인 ‘레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 드 파리’를 통해 파리를 묘사하고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은 위고의 작품 덕에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치면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수난을 겪어야 했는데, 외부의 석상 중 모양이 온전한 걸 찾기 어려울 정도였고 성당 내부는 마구간으로 사용될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19세기 초 철거 이야기가 나온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랬던 노트르담 대성당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년 출간)의 대성공에 힘입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파리 시민의 뜨거운 관심은 복원을 위한 모금 운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1845년, 25년 동안 이어지는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2019년의 첨탑 화재로 외형에 변화가 생기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 공사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사실들만으로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위고에 대한 파리지앵의 과도하다 싶은 애정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위고에게는 작가로서의 인기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파리 시민들이 피의 대가로 얻어낸 공화국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했다.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되는 루이 나폴레옹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제2공화국을 무산시키고 제국주의로 돌아가려 하자 위고는 강력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쫓기는 신세가 됐다. 자유를 박탈당한 파리 시민들은 공화주의자의 신념을 몸소 실천한 위고를 더욱 그리워했다.

파리 시내 빅토르 위고가(街) 124번지. 위고가 사망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Polymagou>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였던 아버지를 둔 위고는 이탈리아와 멀지 않은 도시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가 불화하면서 위고는 10대가 되기 전부터 어머니와 파리에서 살았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태어난 건 아니지만 파리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그가 살았던 파리 시내 집의 주소는 알려진 것만 스무개가 넘는다. 그 중 보쥬 광장의 집은 박물관으로 조성돼 있다. 위고 가족이 280㎡나 되는 이 큰집에서 살기 시작한 게 ‘노트르담 드 파리’가 나온 이듬해라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의 세나클에는 뮈쎄, 발자크, 라마르틴느, 뒤마 등 젊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드나들었다. 낭만파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망명기간을 제외하면 어린 시절부터 50년 넘게 파리에서 산 작가는 그 누구보다 파리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두 번째 문학적 성공과 부를 가져다 준 ‘레미제라블’ 은 1862년에 출간됐는데, 그가 노르망디 해안에서 멀지 않은 게른제 섬에서 망명을 하던 시절이다. 채널 해협의 조그만 섬에 앉아서 파리의 구석구석을 그렇게 자세히 묘사한 것이다. 소설은 바스티유 광장의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본인이 살았던 보쥬 광장이 지척이다.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결혼식을 올리는 생폴 성당은 위고가 자신의 딸 레오폴딘을 결혼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이 두 남녀 주인공의 연애 장소로 활용된 뤽상부르 공원은 위고가 어린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도시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나오기 힘든 작품이었다.

보쥬 광장에 있는 빅토르 위고 생가 박물관 내부.
파리의 곳곳에는 위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가 묻힌 팡테옹, 결혼식을 올린 생-쉴피스 성당, 사서였던 친구 샤를 노디에를 보려고 자주 찾았던 아스날 도서관, 그가 살았던 여러 생가, 그를 기리는 조각상들. 다 열거하기도 어려운 그 모든 장소들을 찾는 게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숨쉬는 파리는 이미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므로.

“내 삶에는 두 개의 사랑이 있다. 그것은 파리와 대서양”이라고 말한 그에게 파리는 동경의 대상이자 열정을 쏟은 곳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념이라고 말해도 좋을 태도를 보였다. 그는 파리 시민을 위해, 가난한 자를 위해 아니 인류를 위해 몸을 내던졌다. 압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표현의 자유와 사형제 폐지를 위해 애썼으며, 정의와 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를 위해 앞장섰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출간된 가이드북의 서문에 그는 이런 문장을 남겼다.

“그것들이 없다면, 89년의 그 결과물이 없다면 파리의 우월성은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잘 생각해보시라. 로마는 더 장엄하고, 트리어는 더 오래됐고, 베니스는 더 아릅답고, 나폴리는 더 우아하고, 런던은 더 풍요롭다. 그런데 파리엔 무엇이 있는가? 혁명이다. [...] 팔레르모에는 에트나산(山)이 있지만 파리에는 사상이 있고, 콘스탄티노플은 태양이 더 가깝지만 파리는 문명에 더 가깝고, 아테네는 파르테논을 지었지만 파리는 바스티유를 부수었다.”

/정상필 전 광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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