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 ②
2021년 09월 24일(금) 07:00 가가
벼슬보다 학문에 뜻을 둔 변사정, 도탄정사 지어 선비들과 교류
김경수, 사문양자 저술 제자 양성
나덕명, 이율곡 문하에서 글 익혀
송제민, 세한계 만들어 시책 건의
김세근, 율곡이이와 양병론 주장
김경수, 사문양자 저술 제자 양성
나덕명, 이율곡 문하에서 글 익혀
송제민, 세한계 만들어 시책 건의
김세근, 율곡이이와 양병론 주장


현재 강진 서남쪽의 포구인 구강포(구십포)는 칠량과 마량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왜적은 함선 수십척으로 구강포 상륙을 기도했으나 염걸의 의병군이 이를 맞아 격퇴했다. 사진은 지금의 구강포.
임진왜란 의병장들은 거병 전에는 조정에 출사해 벼슬을 지낸 뒤 귀향했거나 여러 이유로 초야에 묻혀 학문을 수양한 양반이었다. 이들은 어릴적부터 글, 무예 등에서 남다른 솜씨를 보여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다. 구국충절의 깃발을 들자 인근에서 수 백, 수 천명이 몰려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정도로 높은 인격과 품성을 갖춘 것도 특징이다.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을 짧게 정리했다.
삼도 임계영
임계영은 13세에 부모 곁을 떠나 화순 모후산 유마사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다. 25세에 아버지가, 30세에는 어머니가 각각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이에 보성군 유림들이 포상하고 전라도감사가 쌀과 비단을 보내오기도 했다. 32세에 여름 가뭄이 지독하자 사재를 털어 축내저수지를 만들었다. 선조 9년(1576년) 48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계영은 경북 청송 진보현감에 올라 3년간 치적을 남겼다. 주민들 만류에도 당파싸움에 국정이 해이한 것을 개탄하며 사직하고 귀향해 10여 년간 초야에 묻혀 살았다. 구산촌 뒤 갈마봉 기슭에 천석정(후에 구산정으로 명칭 변경)을 짓고 소일했는데, 틈틈이 병법을 읽으며 무인의 전술과 진법 등 익히기도 했다.
도탄 변사정
벼슬보다 학문에 뜻을 둔 변사정은 3년간 회음사에서 글 공부를 한 뒤 내려와 25세의 나이에 처가가 있는 남원 운봉의 도탄이란 곳에 도탄정사를 지어 호남지역 젊은 선비들과 교류했다. 1559년 4월 29일 큰형의 부고를 접하고 한양에 올라가 1년간 상복을 입고 20세의 송강 정철, 18세의 중봉 조헌과 어울렸다. 다시 남원에 내려와서는 70세의 남명 조식과 어울릴 정도로 이름 높은 선비들과 교류했다. 조식은 도탄정사에서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옌가 하노라”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55세에 송강 정철의 추천으로 진전참봉에 제수됐으나 사양했으며, 율곡 이이의 낙향 소식을 듣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복귀를 요청했다. 56세에 전성주부, 61세에 제능참봉 등에 제수됐으나 역시 사양했다.
괴정 최시망
시망의 아버지 최명순은 56세에 문과에 급제할만큼 집념이 대단했다. 이 같은 집념과 노력은 시망에게 그대로 이어져 9년 뒤 시망은 34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통훈대부 장령(정4품) 겸 춘추관 편수관, 경연청시강관(정4품), 홍문관 전한(종3품), 지제교상의원정(정3품 당하관) 등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를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청주와 김제군수 지냈다.
모의장 최대성
15세에 5월 단오날 보성 개흥사 유림 야유회에서 시를 지었으며, 22세에는 4월 보성 정자천에서 열린 군민축제에서 200보 밖 과녁에 15개 화살을 모두 적중해 명성을 얻었다. 23세 가을에는 오봉 정사제, 제주목사 박응호 등과 전국 유람에 나섰다. 25세에 정자를 덮친 노송을 혼자 힘으로 제거해 장사라는 칭송을 받는 등 이름이 알려지자 보성군수 이기실, 정회(임란 의병장) 등이 찾아와 친구가 됐다. 27세가 되던 해 가까이 지내던 선광회, 문희성, 이득룡, 정홍수, 오경발, 정걸, 선경진 등과 무등산에 올라 규봉암, 서석대, 입석대 등을 구경하고 하산길에 김덕령을 만나 교유했다. 소상진(임계영 막하에서 홍의를 입고 선봉에서 활약하다 전사), 새로 부임한 보성군수 김대정 등과 사귀었다. 선거이(임란 때 전라병사로 활약하다 전사), 손응호(임란 때 진주 3장사와 함께 진주성에서 순절) 등과 함께 신의계(信義契, 일종의 지적모임)를 만들어 충효를 맹세했다. 33세에 무과 병과에 급제한 뒤 같은 해 6월 금강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 보고 시를 지었다. “붓을 놓은 서생이 한 번 몸을 날리니 푸른 하늘에 흙먼지가 자욱하다 남아 대장부가 어찌 시골에서 늙을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을 타고 왜구를 물리칠 것을 맹세하노라.” 이후 차츰 벼슬 올라 훈련원정(정3품 당하관)에 올랐다.
퇴은당 염걸
염걸은 15살에 이미 마을에서 가장 힘세고 큰 키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동생 서와 말타기, 활쏘기 등을 하며 심신을 수련했으며, 1564년 봄 강진의 현재 해창 부근에서 노략질을 심하게 하자 마을 청년 100여명을 모아 간조 차로 왜구의 배가 30여m 밀려나가자 육지에 남아있던 왜구들을 공격해 섬멸했다. 그 뒤에도 무술 익히기와 함께 진법 훈련도 익혔다.
오천 김경수
총명하고 장부다운 기개로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김경수는 7세에 큰아버지 김응두에게 글을 배우고 13세에 시를 지었다. 15살에 하서 김인후 문하에 들어갔고, 학문에 몰두했다. 3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34세에 건원릉 참봉에 천거됐으나 사양했다. 이후 35세에 내첨시 봉사로 임명됐으나 곧바로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 귀향했다. 이후 율곡 이이의 실패를 보고 조정을 멀리하고 ‘사문양자’4편을 저술하는 등 제자 양성에 힘썼다.
소포 나덕명
6형제 중 장남으로 기상이 늠름하고 위풍당당했다고 전해진다. 이율곡 문하에서 글을 익혔고, 이후 곤제 정개청 밑에서도 배웠다. 28세에 진사가 된 뒤 사암 박순의 추천으로 승훈랑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38세에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경북도 경성으로 귀양갔다. 덕명의 스승인 정개청을 미워하고 덕명을 시기한 자의 투고 때문이었다. 귀양 3년만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며, 함경북도에서 피난길의 두 왕자와 신하를 묶어 왜적에게 넘겨주는 등 반역사건이 잇따르자 의병에 참가했다.
해광 송제민
송제민의 아버지 송정황은 1556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에 올랐으나 당시 권신인 윤원형과의 불화로 1557년 귀향길에 올랐다. 하지만 충남 금산을 지나다 객사했으며, 9세의 제민이 금산까지 손수 걸어가 수습했다고 한다. 성리학과 사서삼경 등에 심취했으며, 20세에 전국을 돌면서 토정 이지함, 중봉 조헌 등을 만나 학문 수준을 높이고 경세를 배웠다. 세한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조정에 시책을 건의하고, 율곡 이이 시책 지지 상소도 올렸다. 미암 유희춘의 천거를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무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1588년 중봉 조헌이 함경도 길주로 귀양가자 직접 상소문을 써 선조에게 바치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상소문을 태우고 이후 두문불출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생산과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바다를 사랑해 호를 해광(海狂)으로 하고 전남 곳곳의 섬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소일했다. 1589년 6월 일본 사절단이 통신사 파견 등을 요구하자 제민은 일본 사절단 처형 및 외교 단절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삽봉 김세근
27세에 진사,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35세에 종부사주부(종6품)에 올랐으나 38세에 사임했다. 율곡 이이와 같이 양병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 광산의 백마산골짜기에 교련소를 짓고 무술을 익혔는데, 나주·장성 등에서까지 젊은이들이 몰려와 제자가 됐다. 높이는 134m 불과한 백마산에는 기암괴석과 동굴이 있어 심신단련에 제격이었다. 굴 천정이 움푹움푹 패여 있는데, 키가 큰 세근이 뛰어오르면서 상투가 닿아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햇빛을 가리고 훈련한 곳이 차일봉(遮日峰)이며, 무술을 연마하며 마신 샘물 이름이 옥동샘이다.
습정 임환
임환은 1590년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산학(産學)과 건학(建學)에 힘써 나주 출신으로 창평에 은거중인 김천일과 교류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임계영은 13세에 부모 곁을 떠나 화순 모후산 유마사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다. 25세에 아버지가, 30세에는 어머니가 각각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이에 보성군 유림들이 포상하고 전라도감사가 쌀과 비단을 보내오기도 했다. 32세에 여름 가뭄이 지독하자 사재를 털어 축내저수지를 만들었다. 선조 9년(1576년) 48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계영은 경북 청송 진보현감에 올라 3년간 치적을 남겼다. 주민들 만류에도 당파싸움에 국정이 해이한 것을 개탄하며 사직하고 귀향해 10여 년간 초야에 묻혀 살았다. 구산촌 뒤 갈마봉 기슭에 천석정(후에 구산정으로 명칭 변경)을 짓고 소일했는데, 틈틈이 병법을 읽으며 무인의 전술과 진법 등 익히기도 했다.
괴정 최시망
시망의 아버지 최명순은 56세에 문과에 급제할만큼 집념이 대단했다. 이 같은 집념과 노력은 시망에게 그대로 이어져 9년 뒤 시망은 34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통훈대부 장령(정4품) 겸 춘추관 편수관, 경연청시강관(정4품), 홍문관 전한(종3품), 지제교상의원정(정3품 당하관) 등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를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청주와 김제군수 지냈다.
모의장 최대성
15세에 5월 단오날 보성 개흥사 유림 야유회에서 시를 지었으며, 22세에는 4월 보성 정자천에서 열린 군민축제에서 200보 밖 과녁에 15개 화살을 모두 적중해 명성을 얻었다. 23세 가을에는 오봉 정사제, 제주목사 박응호 등과 전국 유람에 나섰다. 25세에 정자를 덮친 노송을 혼자 힘으로 제거해 장사라는 칭송을 받는 등 이름이 알려지자 보성군수 이기실, 정회(임란 의병장) 등이 찾아와 친구가 됐다. 27세가 되던 해 가까이 지내던 선광회, 문희성, 이득룡, 정홍수, 오경발, 정걸, 선경진 등과 무등산에 올라 규봉암, 서석대, 입석대 등을 구경하고 하산길에 김덕령을 만나 교유했다. 소상진(임계영 막하에서 홍의를 입고 선봉에서 활약하다 전사), 새로 부임한 보성군수 김대정 등과 사귀었다. 선거이(임란 때 전라병사로 활약하다 전사), 손응호(임란 때 진주 3장사와 함께 진주성에서 순절) 등과 함께 신의계(信義契, 일종의 지적모임)를 만들어 충효를 맹세했다. 33세에 무과 병과에 급제한 뒤 같은 해 6월 금강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 보고 시를 지었다. “붓을 놓은 서생이 한 번 몸을 날리니 푸른 하늘에 흙먼지가 자욱하다 남아 대장부가 어찌 시골에서 늙을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을 타고 왜구를 물리칠 것을 맹세하노라.” 이후 차츰 벼슬 올라 훈련원정(정3품 당하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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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은당 염걸과 그의 동생 정헌공 염서, 절재공 염경, 그리고 염걸의 아들 강재공 염홍립 등 4명의 충신을 기리기 위한 파주염씨 사충순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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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칠량면 단월리 주변에는 염걸 장군 등의 묘지, 생가터 등이 산재해 있으나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상태다. |
염걸은 15살에 이미 마을에서 가장 힘세고 큰 키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동생 서와 말타기, 활쏘기 등을 하며 심신을 수련했으며, 1564년 봄 강진의 현재 해창 부근에서 노략질을 심하게 하자 마을 청년 100여명을 모아 간조 차로 왜구의 배가 30여m 밀려나가자 육지에 남아있던 왜구들을 공격해 섬멸했다. 그 뒤에도 무술 익히기와 함께 진법 훈련도 익혔다.
오천 김경수
총명하고 장부다운 기개로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김경수는 7세에 큰아버지 김응두에게 글을 배우고 13세에 시를 지었다. 15살에 하서 김인후 문하에 들어갔고, 학문에 몰두했다. 3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34세에 건원릉 참봉에 천거됐으나 사양했다. 이후 35세에 내첨시 봉사로 임명됐으나 곧바로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 귀향했다. 이후 율곡 이이의 실패를 보고 조정을 멀리하고 ‘사문양자’4편을 저술하는 등 제자 양성에 힘썼다.
소포 나덕명
6형제 중 장남으로 기상이 늠름하고 위풍당당했다고 전해진다. 이율곡 문하에서 글을 익혔고, 이후 곤제 정개청 밑에서도 배웠다. 28세에 진사가 된 뒤 사암 박순의 추천으로 승훈랑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38세에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경북도 경성으로 귀양갔다. 덕명의 스승인 정개청을 미워하고 덕명을 시기한 자의 투고 때문이었다. 귀양 3년만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며, 함경북도에서 피난길의 두 왕자와 신하를 묶어 왜적에게 넘겨주는 등 반역사건이 잇따르자 의병에 참가했다.
해광 송제민
송제민의 아버지 송정황은 1556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에 올랐으나 당시 권신인 윤원형과의 불화로 1557년 귀향길에 올랐다. 하지만 충남 금산을 지나다 객사했으며, 9세의 제민이 금산까지 손수 걸어가 수습했다고 한다. 성리학과 사서삼경 등에 심취했으며, 20세에 전국을 돌면서 토정 이지함, 중봉 조헌 등을 만나 학문 수준을 높이고 경세를 배웠다. 세한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조정에 시책을 건의하고, 율곡 이이 시책 지지 상소도 올렸다. 미암 유희춘의 천거를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무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1588년 중봉 조헌이 함경도 길주로 귀양가자 직접 상소문을 써 선조에게 바치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상소문을 태우고 이후 두문불출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생산과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바다를 사랑해 호를 해광(海狂)으로 하고 전남 곳곳의 섬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소일했다. 1589년 6월 일본 사절단이 통신사 파견 등을 요구하자 제민은 일본 사절단 처형 및 외교 단절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삽봉 김세근
27세에 진사,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35세에 종부사주부(종6품)에 올랐으나 38세에 사임했다. 율곡 이이와 같이 양병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 광산의 백마산골짜기에 교련소를 짓고 무술을 익혔는데, 나주·장성 등에서까지 젊은이들이 몰려와 제자가 됐다. 높이는 134m 불과한 백마산에는 기암괴석과 동굴이 있어 심신단련에 제격이었다. 굴 천정이 움푹움푹 패여 있는데, 키가 큰 세근이 뛰어오르면서 상투가 닿아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햇빛을 가리고 훈련한 곳이 차일봉(遮日峰)이며, 무술을 연마하며 마신 샘물 이름이 옥동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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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환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암군 삼호면에서 은둔했다가 정유재 란이 발발하자 다시 거병했다. 사진은 삼호면 일대. |
임환은 1590년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산학(産學)과 건학(建學)에 힘써 나주 출신으로 창평에 은거중인 김천일과 교류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