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2021년 08월 06일(금) 01:30
우리나라 TV 사극에는 왕이 활을 쏘는 장면이 유난히 자주 나온다. 실제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을 보면 대다수 왕들이 활쏘기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활쏘기를 참관하는 내용도 흔하게 보인다.

특히 역성 혁명을 통해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는 활쏘기를 왕의 심신 단련 수단이자 전쟁을 대비한 군통수권자의 자세로 여겼다. 신하들은 국정과 학문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왕의 활쏘기를 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대왕마저도 활쏘기 참관을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시대 지배층들은 활쏘기를 육예(六藝)의 하나로, 덕행을 쌓는 일종의 의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가 극명하게 반영된 것이 왕과 신하가 함께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 행사였다. 영조는 대사례에서 활 솜씨가 좋은 신하에게는 상을 주었으며 활을 잘 못 쏜 신하에게는 벌주를 내렸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가장 활을 많이 쏘았으며, 또 잘 쏘았던 왕은 정조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활을 쏠 때면 대개 한번에 10순(巡)을 쐈는데, 1순은 화살 다섯 대를 이른다. 정조실록 및 박제가의 ‘어사기’(御射記)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하면 정조는 50대를 쏘아 거의 과녁에 맞혔으며, 이중 30대 정도는 과녁의 중앙인 정곡을 맞힐 정도로 명궁이었다고 한다.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11월21일 세 번째 기사에는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다. 10순(50발)에 49발을 맞혔다”라고 적혀 있다. 이후 11월22일, 11월23일, 11월25일 등의 기사에도 글자 한 자 다르지 않은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내가 활쏘기에서 49발 명중에 그친 것은 모조리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50발 중 명중되지 않은 한 발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군왕으로서 겸양의 자세를 보여 주려는 의도일 터인데, 또 그만큼 활쏘기에 대한 정조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올림픽 양궁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안산 선수가 최근 광주여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선수로서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는 것이 다음 목표’라고 밝혔다. 파리올림픽에서도 신궁 안산의 활약을 기대한다.

/채희종 사회부장 chae@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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