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대안…바흐의 음악도시, 독일 라이프치히
2021년 07월 28일(수) 07:00
도시와 예술 <2>
네오 라우흐· 팀 아이텔 등
신 라이프치히 화파
폐쇄된 방직공장을 작업실로
세계적 공연장 게반트하우스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등 초연
작곡가·지휘자 멘델스존 활약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현대 미술의 중심이 베를린으로 옮겨 가면서, 세계미술 시장은 베를린의 뒤를 추격하는 도시로 구 동독의 라이프치히를 주목한다. 현대 미술의 선두주자인 신 라이프치히 화파가 있기 때문이다. 이 화파의 탄생은 도시의 오랜 역사와 맞물려 있어서 더 흥미롭고 의미가 크다. 역사적으로 직물산업이 크게 발달했던 라이프치히에는 한 때는 4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할 정도로 큰 규모의 면사 방직공장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1884년에 슈피너라이(면사방직공장)이 설립됐지만 쓸모가 없게 되자 1993년에 결국 폐쇄됐다.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산실인 방직공장.
그 후 방치된 이 공장 건물에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섰고 화가들의 작업실이 문을 열었다. 여기에 둥지를 튼 화가들이 바로 신 라이프치히 화파다. 이들은 주로 라이프치히 미술대 출신들로 시장 자본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구 동독 시절의 화가들이다. 도시의 역사를 품은 공간에서 시대와 시장의 유행과는 관계없이 약 30여 명의 화가들이 자신들 이야기를 화폭에 표현하는 작업을 해 온 것이다. 이 화파의 대표적 선두화가가 네오 라우흐, 팀 아이텔, 틸로 바움게르텔 등이다.

특히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네오 라우흐는 1992년부터 슈피너라이에서 작업하기 시작해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지금도 이 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 화파는 공간의 구분 및 인물의 구성, 강렬한 대비 색채에 집중하면서 전통적인 회화의 감성을 중요시한다. 또 독일 통일전후의 혼란과 불안을 특유의 색채와 우울하고 냉소적이며 낭만적인 감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회화적 미학이 구상 중심으로 점점 난해해지는 현대 미술의 대안이자 출구라는 평가를 받는다.

라이프치히는 사실 바흐의 음악도시다. 바흐는 이 도시에서 1723년부터 1750년까지 27년을 성 토마스 교회의 합창단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바흐는 부임하던 첫해에 대작 ‘요한 수난곡’을 시작으로 ‘마태수난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 대표곡들을 작곡했으며, 매일 칸타타를 봉헌했다. 교회 안 바흐의 묘지 앞에는 지금도 여전히 꽃들이 놓여있다. 이 위대한 음악가에 대한 존경을 아인슈타인은 “듣고, 연주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입을 다물라”라는 말로 표현했다.

라이프치히가 음악도시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멘델스존의 역할이 매우 컸다. 멘델스존이 1935년에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은 바흐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많은 애를 썼다. 덕분에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으면서 음악이 재평가 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슈만의 활동 무대와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클라라의 출생지가 라이프치히이다. 슈만이 발견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과 멘델스존의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도 라이프치히의 교향악단을 통해 세상에 소개됐다.

그런데 라이프치히의 연주홀 이름이 아주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도시 이름을 사용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그 대신에 게반트하우스(직물회관)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1781년에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직물상인들이 직물회관의 2층에 500석 규모의 콘서트홀을 만들고 연주를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현재의 게반트하우스는 세 번째 건축된 콘서트홀로 1900석에 최고의 음향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축 당시는 아직 구 동독 시절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세계 정상급 수준의 시설이 가능했던 것은 독일 평화통일 시위를 앞장 서서 이끌었던 지휘자 쿠어트 마주르의 힘이 매우 컸다. 게반트하우스의 또 다른 명물은 라이프치히 출신의 화가 지그하르트 길레의 ‘삶의 노래’라는 4부 연작 천장화다. 유럽 최대 규모의 현대 천장화는 음악과 미술의 조화로움으로 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며, 밖에서도 게반트하우스의 천장화는 잘 들여다 보여서 마치 미술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라이프치히 평화혁명벽화.
라이프치히 시민의 높은 자긍심은 자신들이 독일 평화통일의 주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1165년에 건축된 유서 깊은 니콜라이 교회에서 평화시위 전에 평화기도회가 1982년 9월부터 퓌러 목사의 주도로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기도회의 촛불이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9년 9월 기도회를 마치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자 밖에는 이미 수 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고, 기도회는 교회 밖의 촛불시위가 되었다. 이후 매주 시위가 계속되었고 오랜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통일의 길이 열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통일 운동에 성 토마스 교회도 나중에 함께 했다.

라이프치히의 또 다른 매력은 괴테의 세계적 작품 ‘파우스트’의 배경이라는 점이다.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평생 학문만 알던 노학자 파우스트를 데리고 술집을 가는데, 그 곳이 바로 1525년에 문을 연 이후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 ‘아우워바흐’라는 지하식당이다. 파우스트는 이 식당에서 처음으로 젊은이들의 문화를 직접 경험한다. 이 식당 입구에는 파우스트의 인물들을 본 뜬 동상들이 서 있어서 마치 파우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괴테가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괴테는 라이프치히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는 ‘작은 파리’라고 칭송했다. 이런 라이프치히의 음악과 미술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라이프치의 책문화로 이어진다. 그 중심에 ‘라이프치히는 독서 중’이라는 슬로건으로 열리는 500년 넘는 전통을 가진 도서전이 있다. 한 때 라이프치히는 전쟁과 분단을 거쳐서 통일 이후까지 구 동독의 ‘가라앉는 도시’였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끈기 있는 노력과 의지로 2019년 가장 혁신적인 도시로 선정됐고 이제는 베를린과 겨루는 현대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라이프치히가 매력적인 것은 여전히 거대한 자본화의 힘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도 자신들의 삶과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상상력과 창조적 실험의 결합이 가능한 조건은 수 많은 예술가들을 라이프치히로 불러 모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라이프치히의 저력은 하루 아침에 얻어진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라이프치히의 자유 정신과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예술 운동은 괴테, 피히테, 니체를 비롯해서 세계의 최고 지도자로 평가되는 독일의 메르켈 전 총리까지 배출한 역사적 토대 위에 있으며, 스스로 자부심을 지켜내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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