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조국에 헌신한 의병장들의 고향과 가문 ③
2021년 05월 28일(금) 01:20 가가
삽봉 김세근, 무오사화 피해 후 함안→고흥→서창으로 거처 옮겨
도절도사 임진 넷째아들 임환, 벼슬 버리고 산학·견학에 매진
유경안 장남 유팽로, 곡성 옥과 고향
도절도사 임진 넷째아들 임환, 벼슬 버리고 산학·견학에 매진
유경안 장남 유팽로, 곡성 옥과 고향


1593년 6월 19일부터 29일까지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전쟁기간(1592~1598) 벌어진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으며, 그로 인해 무려 7만 여명의 의병과 주민들이 희생됐다. 호남의 입구에 해당하는 이 진주성에는 조정, 명나라, 경상도 의병 등이 모두 포기했으나 오로지 남도의병만이 입성해 주민들과 함께 왜적과 맞섰다. 사진은 진주성과 남강.
임란 의병장들은 가문과 고향의 자랑으로, 태몽에서 설화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내려온다. 아쉽게도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잊혀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도 어려운 한자로만 돼 있어 현 세대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은 현장 취재와 문중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문집. 행랑 등의 자료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들을 발굴했다.
삽봉 김세근은 1550년(명종 5년) 4월 18일 경남 함안군 마수동에서 아버지 김석경과 어머니 낙안 오씨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보로, 동생으로 수근이 있다. 1587년 고흥으로, 1588년 광산군 서창면 세하리 세동으로 이사했다. 무오사화의 피해를 입은 김씨 일가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거처를 옮겼다는 설이 있다. 고경명 의병에 합류해 1592년 7월 10일 만 42세의 나이로 충남 금산에서 전사한 뒤 아들 추남과 동생 수근이 시신을 찾으려했으나 찾지 못해 영혼을 불러 장례(초혼장)를 치렀다.
습정 임환은 1561년(명종 16년) 5월 13일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에서 오도절도사 임진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맏형이 당대 명문장가로 이름 난 백호 임제다. 자는 자중을 썼고, 선조가 개성에 살다가 조선시대 접어들어 나주로 이사했다. 집안 가훈이 ‘정도(正道)’였다고 한다. 임환은 1590년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산학(産學)과 건학(建學)에 힘썼다. 가끔 창평에 은거중인 김천일과 교류했다. 임환의 부실(첩)이 의병장 양산숙의 여동생(서얼) 양씨 부인으로, 그녀는 임란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함께 왜적을 피해 피난선에 올랐으나 몽탄강에서 왜적과 만났다. 왜적들이 양씨 부인의 미모에 감탄해 가족들에게 양씨 부인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결국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왜선으로 건너간 양씨는 가족들이 탄 배가 멀어지자 강물로 투신해 숨졌다.
충민공 양산숙은 1561년 광산구 임곡면 박호리에서 아버지 송천 양응정과 후처 죽산 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8세에 중시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학자 양응정은 광양 임씨를 아내로 삼았으나 맏아들 산해를 낳고 숨져 죽산 박씨와 재혼해 산룡·산숙·산축 3형제를 뒀다. 양응정은 산숙 등에게 진법, 합변 원리 등을 가르쳤다. 산숙이 21세가 됐을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혼은 산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호가 아닌 유지지사(有志之士)라고 불렀다고 한다. 반계라는 곳에 정사(精舍)를 지어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나중에 삼남향에 집을 지어 100리 떨어진 어머니에게 매일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산룡·산숙이 거병하고, 산축은 어머니를 모시고 군량을 모으는 역할을 맡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의 명을 받아 지원군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패한 뒤 혈혈단신으로 돌아와 함께 전사했다. 산룡은 군량 운반에 동원돼 죽음을 피했다. 산숙의 초혼장이 끝난 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산룡·산축은 어머니, 산룡의 처 유씨, 산숙의 처 이씨, 산축의 처, 여동생 등 양씨 일가는 무안으로 피신했으나 포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왜적과 만나게 됐다. 이 때 임신하고 갈대밭에 숨어있는 산축의 처만 목숨을 부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물에 투신하거나 자결했다.
충경공 이정란은 1529년(중종 24년) 전주 남문안(교동 290번지)에서 세자 시강원 사서 등을 지낸 이승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문부, 본관은 전의다. 고려 개국공신 이도의 자손이다. 이정란의 선조는 한양에 살았으나 증조부인 예조정랑 이창수가 전주에 터를 잡았다. 경전에 밝아 동생 이정기를 가르쳤으며, 이정기는 전주 풍남문의 ‘호남 제일의 문’이라는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68년 40세의 나이에 문과에 합격했으나 1572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르느라 1572년에서야 첫 벼슬인 교서정자(정9품)에 올랐다.
표의장 심우신은 1544년(중종 39년) 8월 21일 전 곡산군수 아버지 심수와 어머니 죽산 박씨의 셋째 아들로, 경기도 통진(김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택, 본관은 청송이다. 5대조가 세종의 장인인 영의장 심온이다. 건장한 체구에 용력도 비범했으나 위장병이 있어 15~16세에 의원의 권유로 활쏘기에 나섰다. 18세에 이억년의 딸 전주 이씨와 혼인했으나 2년만에 상처하고, 24세에 무관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됐다. 25세 왕명으로 영광에 내려와 선무랑 임식의 딸에게 반해 재혼한 뒤 아들 셋을 뒀다. 1593년 6월 29일 만 49세로 죽기 전 아들 허에게 편지를 보내 “전주성이 함락되면 내 망일(亡日)이 될 터이니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것으로 족하다”고 알렸다. 허는 아버지의 사체를 찾지 못하자 초혼장을 치렀다.
월파 유팽로는 1564년(명종 19년) 옥과현 합강(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아버지 유경안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향숙, 본관은 문화다. 아버지는 중사마시에 급제해 이원군수, 충주판관 등을 지내다 을사사화에 회의를 느껴 고향 인 옥과에서 은둔했다.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팽로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랐다. 6세에 “앞에는 합강수가 도도하고 뒤에는 옥출산이 둘렀도다. 강수와 수만세를 빌어 원했으니 여기에 다만 집안 어르신을 가까이 모시고 즐거워함만이 바람일 뿐이로다”라는 시를 지어 조부인 유재를 놀라게 했다. 1588년 25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올라 김상헌 등 소장파 학자들과 어울렸다. 1590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낙향해 삼년상을 치르며 왜적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3번이나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1592년 4월 임란이 발발하자 용인 5대조 묘소를 지키던 묘지기 김충남과 함께 옥과에 내려와 의병을 모아 거병했다. 자신의 이종형이자 부호인 양대박이 거병해 유팽로와 군사를 합쳐 담양 고경명을 찾아가 추성관 혈맹을 맺었다. 29세의 나이로 전사했으며 부인 김씨도 삼년상을 치른 뒤 순절했다.
충장공 양대박은 1543년(중종 38년) 9월 8일 남원군 주생면 상동리 이언부락 661번지에서 아버지 사헌부 집의 양의와 둘째부인 첨사 박총의 딸 안동 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양자윤은 사포별제, 증조부 양계옥은 부사직, 고조부 유경로는 경상도절도사 등을 지냈다. 대박은 18세에 부사직 신지의 딸 고령 신씨와 혼인해 25세에 맏아들 경우, 31세에 둘째 아들 형우를 얻었다. 3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육예(禮樂射御書數), 구류(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흑가, 종횡가, 잡가, 농가), 병서 등을 익혔다. 가문의 계보를 엮은 세보 권두에 양대박과 아들 형우가 등장하는 운암파왜도(雲岩破倭圖)가 실려 있다. 큰아들 경우는 1595년 군량을 모아 명군에 전달하는 등 공적을 세웠다.
죽천 범기생은 1553년(명종 8년) 2월 27일 광주시 북구 생용동에서 범홍노의 아들로 출생했다. 범씨 가문은 조선시대 이후 은둔했는데, 부자이면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범홍노의 사랑채에는 식객들이 매일 몰려 들었다고 한다. 사서오경에 주역까지 깨쳐서 관상이나 천기에도 능했다. 한양에서 학문을 익히다 25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렀다. 이 때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위해 곳간을 열어 나눴다. 산학(産學)에 심취해 생산자는 늘리되 소비자를 줄이고, 생산은 신속하게 하되 소비를 더디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후 국난을 예측해 동생인 기봉에게 말을 구해오게 한 뒤 무예 증진에서 힘썼다. 진주성에 입성하며 “천리를 행군하여 진양으로 들어가니 성에 가득한 달빛에 갑옷마저 차도다. 함께 온 장병들의 충의가 가득 차니 동남의 아무리 강한 적인들 두려울 것 있으랴.”는 시를 지어 군사들을 격려했다.
형제의병장 홍민언·민성은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속칭 도래(道川)마을에서 태어났다. 사촌 간으로, 홍민언은 1537년(중종 32년) 2월 4일 29세의 홍련과 서산 유씨의 외아들로, 자는 계위. 호는 호은을 썼다. 민성은 1556년(명종 11년) 참의를 지낸 홍증과 영광 김씨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민언보다 19세 아래로, 자는 여중, 호는 석계다. 고조부 홍수가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그 전에는 경북 안동의 풍산현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함재 기효증은 1550년(명종 5년) 나주 임곡(광산군 임곡면)에서 고봉 기대승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남의 큰 선비 기대승은 본관이 행주로, 청빈이 가문의 계명이었다. 기대승은 1558년 문과에 급제해 14년간 종9품에서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그 중간에 4~5차례 낙향하기도 했다. 33세이던 1560년부터 7년간 퇴계 이황과 벌린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부인은 성풍 이씨다. 동생인 효민, 효맹의 글공부를 도왔던 효증은 1570년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아버지 기대승은 1572년 11월 1일 낙향하던 도중 전북 고부에서 객사했으며,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상을 치르기 어려운 처지를 안 사간원에서 선조에게 상소해 조정이 장례를 주관했다. 여동생은 하서 김인후의 손자 김남중과 혼인했는데, 임란이 발발하자 피난갔다가 장성으로 돌아오다 왜적을 만나 손목을 잡혔다는 이유로 손목을 찌르고 황룡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이 때 손자 둘은 납치돼 일본 규슈지방으로 끌려가 가사이(河西)라는 성을 쓰며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충경공 이정란은 1529년(중종 24년) 전주 남문안(교동 290번지)에서 세자 시강원 사서 등을 지낸 이승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문부, 본관은 전의다. 고려 개국공신 이도의 자손이다. 이정란의 선조는 한양에 살았으나 증조부인 예조정랑 이창수가 전주에 터를 잡았다. 경전에 밝아 동생 이정기를 가르쳤으며, 이정기는 전주 풍남문의 ‘호남 제일의 문’이라는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68년 40세의 나이에 문과에 합격했으나 1572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르느라 1572년에서야 첫 벼슬인 교서정자(정9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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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남도의병장은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고경명의 큰 아들), 황진, 장윤, 이종인, 고종후의 숙부인 고경형과 그의 충복 봉이·귀인, 오유, 강희열·희보·희복·희원, 심우신, 손응호, 김극후·극순(김경수의 아들들) 등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사진은 진주성 촉석루와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의암. |
월파 유팽로는 1564년(명종 19년) 옥과현 합강(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아버지 유경안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향숙, 본관은 문화다. 아버지는 중사마시에 급제해 이원군수, 충주판관 등을 지내다 을사사화에 회의를 느껴 고향 인 옥과에서 은둔했다.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팽로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랐다. 6세에 “앞에는 합강수가 도도하고 뒤에는 옥출산이 둘렀도다. 강수와 수만세를 빌어 원했으니 여기에 다만 집안 어르신을 가까이 모시고 즐거워함만이 바람일 뿐이로다”라는 시를 지어 조부인 유재를 놀라게 했다. 1588년 25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올라 김상헌 등 소장파 학자들과 어울렸다. 1590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낙향해 삼년상을 치르며 왜적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3번이나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1592년 4월 임란이 발발하자 용인 5대조 묘소를 지키던 묘지기 김충남과 함께 옥과에 내려와 의병을 모아 거병했다. 자신의 이종형이자 부호인 양대박이 거병해 유팽로와 군사를 합쳐 담양 고경명을 찾아가 추성관 혈맹을 맺었다. 29세의 나이로 전사했으며 부인 김씨도 삼년상을 치른 뒤 순절했다.
충장공 양대박은 1543년(중종 38년) 9월 8일 남원군 주생면 상동리 이언부락 661번지에서 아버지 사헌부 집의 양의와 둘째부인 첨사 박총의 딸 안동 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양자윤은 사포별제, 증조부 양계옥은 부사직, 고조부 유경로는 경상도절도사 등을 지냈다. 대박은 18세에 부사직 신지의 딸 고령 신씨와 혼인해 25세에 맏아들 경우, 31세에 둘째 아들 형우를 얻었다. 3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육예(禮樂射御書數), 구류(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흑가, 종횡가, 잡가, 농가), 병서 등을 익혔다. 가문의 계보를 엮은 세보 권두에 양대박과 아들 형우가 등장하는 운암파왜도(雲岩破倭圖)가 실려 있다. 큰아들 경우는 1595년 군량을 모아 명군에 전달하는 등 공적을 세웠다.
죽천 범기생은 1553년(명종 8년) 2월 27일 광주시 북구 생용동에서 범홍노의 아들로 출생했다. 범씨 가문은 조선시대 이후 은둔했는데, 부자이면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범홍노의 사랑채에는 식객들이 매일 몰려 들었다고 한다. 사서오경에 주역까지 깨쳐서 관상이나 천기에도 능했다. 한양에서 학문을 익히다 25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렀다. 이 때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위해 곳간을 열어 나눴다. 산학(産學)에 심취해 생산자는 늘리되 소비자를 줄이고, 생산은 신속하게 하되 소비를 더디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후 국난을 예측해 동생인 기봉에게 말을 구해오게 한 뒤 무예 증진에서 힘썼다. 진주성에 입성하며 “천리를 행군하여 진양으로 들어가니 성에 가득한 달빛에 갑옷마저 차도다. 함께 온 장병들의 충의가 가득 차니 동남의 아무리 강한 적인들 두려울 것 있으랴.”는 시를 지어 군사들을 격려했다.
형제의병장 홍민언·민성은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속칭 도래(道川)마을에서 태어났다. 사촌 간으로, 홍민언은 1537년(중종 32년) 2월 4일 29세의 홍련과 서산 유씨의 외아들로, 자는 계위. 호는 호은을 썼다. 민성은 1556년(명종 11년) 참의를 지낸 홍증과 영광 김씨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민언보다 19세 아래로, 자는 여중, 호는 석계다. 고조부 홍수가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그 전에는 경북 안동의 풍산현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함재 기효증은 1550년(명종 5년) 나주 임곡(광산군 임곡면)에서 고봉 기대승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남의 큰 선비 기대승은 본관이 행주로, 청빈이 가문의 계명이었다. 기대승은 1558년 문과에 급제해 14년간 종9품에서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그 중간에 4~5차례 낙향하기도 했다. 33세이던 1560년부터 7년간 퇴계 이황과 벌린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부인은 성풍 이씨다. 동생인 효민, 효맹의 글공부를 도왔던 효증은 1570년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아버지 기대승은 1572년 11월 1일 낙향하던 도중 전북 고부에서 객사했으며,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상을 치르기 어려운 처지를 안 사간원에서 선조에게 상소해 조정이 장례를 주관했다. 여동생은 하서 김인후의 손자 김남중과 혼인했는데, 임란이 발발하자 피난갔다가 장성으로 돌아오다 왜적을 만나 손목을 잡혔다는 이유로 손목을 찌르고 황룡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이 때 손자 둘은 납치돼 일본 규슈지방으로 끌려가 가사이(河西)라는 성을 쓰며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