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조국에 헌신한 의병장들의 고향과 가문 ①
2021년 04월 30일(금) 06:00
화순 출신 충의공 최경회, 고려 해동공자 최충의 16대손
충렬공 고경명, 광주 대촌에 생가…고맹영의 아들
문열공 김천일, 거란족 무찌른 김취려 장군 14대 손
‘형제 의병장’ 강희보·강희열, 순천부사 지낸 강천상 아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경회와 문홍헌, 을묘왜변 때 순국한 조현 등의 충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누각인 삼충각. 화순 능주에 있으며 맞은편이 능주천이다. 능주천도 충신강이라고 불린다. 1685년(숙종 11년) 능주 향교의 유림들이 절벽 위에 3동의 작은 건물을 세웠으며, 1985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됐다.

의병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정의의 군병’을 말한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의 필자 조동수 전 광주일보 주필은 “우리 역사는 수난의 역사인 동시에 극복의 역사”라고 정의한 뒤 “역사란 바로 역사 정신이며, 역사정신은 민족정기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임진왜란 등에서의 의병 거병이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배경은 농민들의 향토애와 유림들의 구국을 위한 애국정신으로, 이는 ‘자존과 자주의 회복을 위한 대장정’이었다고 정의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에 등장하는 34명의 임란 의병장들은 자신의 자녀, 형제, 친척 등을 총동원해 구국의 길에 나섰다. 그 의병장들의 가문, 고향, 의로운 길에 함께 한 집안 사람들을 소개한다.



충렬공 고경명의 생가는 광주시 광산구 대촌면 압촌리 101번지다. 1975년 광주일보 취재 당시 그 주소지에는 1910년대 다시 지은 집이 있었으며, 17대 손인 고원희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었다. 고경명은 1533년(중종 28년) 11월 30일(그믐) 당시 광산군 유등곡면 압보촌(대촌면 압촌리)에서 고운의 손자,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명의 조상은 장흥사람으로, 자는 이순, 제봉, 태헌, 태사 등을 썼다. 5형제의 장남이었으며, 홍문관 부제학의 딸 울산 김씨와 혼인해 일가를 이뤘다. 그는 1592년 4월 13일 임란이 발발한 뒤 5월 22일 소식을 듣고 5월 25일 아들인 종후(복수의병장), 인후와 함께 논의한 뒤 거병했다. 6월 11일 출정하면서 쓴 격서에서 “우리 도내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명하고, 형이 아우에게 권하여 의도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게 하라. 속히 결단하여 선을 따르고 머뭇거리다가 자신을 그르치지 말기 바란다. 짐짓 이렇게 충고하노니 격서가 이르거든 곧 시행하라”고 썼다. 그 격서대로 경명과 자신의 두 아들, 3부자가 모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전사한 훈련원 판관 김인갑, 그 아우 주부 김의갑,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인갑의 아들 김시엽의 충의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1872년(고종 10년) 세운 화순 쌍봉리의 충신각.


문열공 김천일은 1527년(중종 32년) 5월 고려시대 거란족을 무찌르고 북방을 지켰던 김취려 장군의 14대 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인 양성 이씨가 산고로 숨지고, 아버지 진사 김언침마저 생후 7개월만에 타계하면서 외조모인 이천 서씨가 동냥젓으로 키웠다. 담양군 창평면 태산리 출신인 김언침은 가난해 장인 이함이 사는 나주군 신촌면 흥룡동(나주읍 송월리)으로 와 처가살이를 했다. 사실상 고아였던 김천일은 흥룡동을 흐르는 완사천이라는 샘에서 아낙들의 물동이를 깨는 개구장이였다고 한다. 12세때부터 철이 들어 학문에 정진하고 18세에 평안북도 위원군의 군수를 지낸 김효량의 딸과 혼인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나주에 살던 외삼촌 이광익에게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고, 두 아들 상건, 상곤과 거병했다. 이후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왜적에 밀리자 맏아들 상건과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해 순사했다.

충의공 최경회는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고사정 출신이다. 1975년 당시 13대 방손인 최유상씨가 살고 있었다.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렸던 석학 최충의 16대손으로, 1532년(중종 27년) 최천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6살 위 경운, 3살 위 경장 등과 어울려 한시를 지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자는 선우, 호는 일휴당 또는 삼계를 썼다. 16세에 종6품 교수를 지낸 김원의 딸 나주 김씨를 맞아 혼인했다. 최경회는 1592년 어머니 삼년상을 지내면서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두 아들 홍기·홍적, 첫째 형 경운과 그의 맏아들 홍재, 둘째 형 경장과 그의 맏아들 홍우 등과 논의해 거병했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김천일, 고종후 등과 남강에 투신해 숨졌으며,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경장은 65세의 나이인 1593년 8월 거병했다. 의주에 있던 선조는 “아우가 국난에 순절하매 형이 이어 의거하니 옛사람에게도 그 예가 드문 일”이라며, 이을 계(繼)를 써 ‘계의병대장’이라 칭하고 인(印)을 하사했다. 여기에 경회의 맏아들 홍기, 경운의 맏아들 홍재도 참여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10월 화순에 왜적 3,000여 명이 쳐들어오자 73세의 최경운이 둘째 아들 홍수와 향병 200여 명을 조직해 인근 오성산에 올라 대항했으나 모두 전사했으며, 이 때 경회 부인인 김씨 부인도 자결했다.

형제의병장 강희보·강희열은 광양시 봉강면 신촌리에서 순천부사를 지낸 강천상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1561년(명종 16년) 8월 13일, 1562년(명종 17년) 9월 15일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옛집은 오랜 세월에 없어져 밭으로 바뀌었다. 고려 현종 당시 명장인 은열공 강민담(강감찬의 부장)의 14대 손으로, 희보는 10세 때부터 대학, 중용, 사서삼경을 읽었고, 희열은 고집이 세고 얼굴이 준수했다고 한다. 어릴 적 병졸놀이를 하면서부터 희보는 활, 희열은 칼을 잘썼다. 희보는 17세에 승주 장광석의 차녀와 희열은 18세에 여산 송씨 송계수의 딸과 각각 혼인했다. 임란이 일어나자 희보·희열은 백부 강인상을 찾아가 상의했으며, 이에 따라 강인상은 의병장 곽재우, 희보는 의병장 김면에게 합류했다. 희열은 구례 석주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 형제는 전운이 감도는 진주성에서 다시 만났으며, 강인상은 자신의 두 아들 희복·희원을 진주성으로 보냈다. 진주 강씨 문중의 8명이 의병에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4명이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했다.

임계영의 생가는 보성군 오성면 축내리 64번지에 있었다. 1975년 취재 당시 삼도의 13대손 임철모옹(93)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진은 축내리 64번지 일대.


의병장 임계영의 종사관 오봉 정사제는 보성군 도촌면 신산촌(현재 득량면 마천리)에서 1556년(명종 11년) 10월 20일 아버지 진사 송재 정성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유인, 오봉을 썼으며, 9대조가 단종을 보좌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죽임을 당한 정분이다. 증조부인 석보 정숙인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충장공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12월 29일 광주 석저촌(충효리)에서 가난한 선비 김붕변와 남평 반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으로, 자는 경수다. 낭장군 김규의 후손이며, 조선 태종 당시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광산군 김한로의 11대손이다. 형은 고경명 의병에 합류해 전사한 덕홍, 동생은 덕보였으며, 누이도 있었다. 8세에 홍문관 교리를 지낸 후 환벽당에 머물던 소촌공 김윤제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14세에 부친이 사망하고 집안이 곤궁해지자 작은 아버지가 살던 동복현 복천 석교천(현 화순군 남면)으로 이사해 물고기를 잡고 칡을 캐 어머니를 봉양했다. 17세에 지역인재로 추천되기도 했으며, 18세에 담양의 첨정 이대록의 딸이자 이인경의 누이인 흥양 이씨와 혼인했다. 덕령은 이후 학문의 부족함을 깨닫고 큰형 덕홍, 매형 김응회 등과 광산구의 벽진서원에서 우계 성혼으로부터 서한으로 강의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사정상 우계 성혼이 있던 경기도 파주까지 가지 못하고 매달 인편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공부했다.

삼도 임계영은 1528년(중종 23년) 4월 9일 아버지 진사 임희중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홍보, 호는 삼도, 본관은 장흥이다. 아버지 임희중이 장흥에서 보성으로 이사했다. 형으로는 만영, 천영, 백영, 정영 등이 있고, 동생 이름은 마지막을 의미하는 말영이다. 11세부터 서당에 다녔고 옥편을 모두 외울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전해진다. 13세에 부모 곁을 떠나 화순 모후산 유마사에 들어가 글공부를 했고, 15세에 내려와 16세에 광산 김씨와 혼인했다. 병약한 부인 김씨가 3년만에 숨지자 22세의 나이에 이조좌랑을 지낸 송대평의 딸 남양 송씨와 재혼했다. 25세에 아버지, 30세에 어머니가 각각 별세하자 삼년상을 지냈으며, 효자로 알려져 보성군내 유림들이 포상하고, 전라도감사 정찰이 쌀과 비단을 보내오기도 했다. 32세에는 여름 가뭄이 지독하자 주민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축내저수지를 조성했고, 37세에 이르러서야 맏아들 집, 2년 뒤 둘째아들 진이 태어났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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