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귀양 나덕명, 죄인 신분으로 의병 일으켜
2021년 04월 16일(금) 09:00
新 호남 의병 이야기 <7> 전란 속에 빛난 선비들의 네트워크 ②
각지와 연계하며 지역 지킨 의병장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한
최대성 의병장과 두 아들 언립·후립
김경수, 장성 남문에 의병청 설치
전주 의병장 이정란, 전주성 사수 위해
정협·윤계 종사관으로 삼아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 마동부락 455번지 오봉 정사제의 생가. 1975년 광주일보 취재 당시 12대손 정종암씨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46년이 지난 지금은 14대손인 정상호(75)씨 부부가 살고 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등장하는 임진왜란 의병장 34명은 상당수가 당시 최고의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동문수학하거나 어울렸던 이들과 함께 거병했다. 의병장은 모두 양반들이 맡았다. 이들은 지역 내외에서 동문수학한 벗, 스승 등과 오랜 시간 다져온 친분과 의리로 맺은 네트워크를 통해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했으며, 전투와 관련 각종 정보를 얻었다.



모의장(募義將) 최대성은 27세의 나이에 선광회, 문희성, 이득룡, 정홍수, 오경발, 정걸, 선경진 등과 광주의 무등산에 올라 규봉암, 서석대, 입석대 등을 구경하고 하산길에 성안촌(지금의 충효리)에 들려 김덕령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또 소상진(임란이 발발하자 임계영 막하에서 붉은 갑옷을 입고 선봉에서 활약하다 전사), 당시 새로 부임한 보성군수 김대정 등과 교분이 깊었다. 30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당시 김득광, 손응호 등이 찾아와 위로하기도 했다. 선거이(임란 때 전라병사로 활약하다 전사), 손응호(임란 때 진주 3장사와 함께 진주성에서 순절) 등과는 일종의 지적 모임인 신의계를 만들어 충효를 맹세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이 때 큰아들 언립, 셋째아들 후립 등은 물론 황원복, 전방삭, 정회와 그의 가족인 대민, 대영, 그리고 김례의, 이인복, 송대립, 김덕방, 이신수 등의 용장을 비롯해 하인이었던 두리동, 갑술형제 등이 함께 했다.

오천 김경수는 1592년 7월 10일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제인 전 판관 김신남, 그의 아들 극후, 극순, 문하에 있던 김언희 등을 거느리고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냈다. 같은 달 19일 기효련, 윤진, 장성현령 백수종 등이 찾아왔으며, 8월 18일에는 전주의 의병장 이정란이 찾아와 군사를 합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며 군자금만 주고 되돌려보냈다. 기효련, 박환래 등이 의곡을 가져오겠다고 제의하기도 했으나 군량과 군사가 미흡해 거병에 어려움을 겪었다. 8월 29일에는 찾아온 선비들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9월 16일 김홍우가 의병 60여 명, 군량 20여 석. 말 7필, 소 3마리를 보내오는 등 11월 들어서면서 장성 남문으로 의병과 군량미가 몰려들자 11월 17일 제단을 쌓고 맹주로 추대됐으며, 의병장은 전투 경험을 가진 오봉 김제민이 맡도록 했다.

열사 최욱의 거병에는 양반보다는 주로 이름 없는 백성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최욱은 자신을 따르던 300여 명의 의병을 장정 중심의 1진, 어린아이와 부녀자 2진(보급대), 노인들 3진(후방 지원)으로 분류했다. 영암에서 거병해 율치에서 진을 치던 김덕흡에게 구원 요청을 받고 이동중에 왜적을 만나 전사했는데, 당시 선수라는 이름의 어린 하인이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선영으로 이장했다.

소포 나덕명은 승훈랑 의금부도사로 있던 1589년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경북도로 귀양을 갔다. 그는 죄인 신분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대열에 지달원, 최배천, 오박, 강문우, 김사주, 정견룡, 오응태, 나정언, 유경천, 오대남, 이성임, 최동망 등이 합세했다. 나덕명은 길주성 밖으로 나와 약탈하는 왜적 1000여 명을 원충서, 한인제 등과 기습해 왜적 8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포로로 잡힌 남녀 백성을 풀어주고, 말 100필을 되찾았다. 또 책성에서 400여 명의 왜적이 나오는 길에 매복해 함이량, 강문우, 박곤수, 이언포 등과 싸웠고, 충남 서천군수의 요청을 받고 서천을 구원하기 위해 가던 길에는 구황, 박은주, 인원침, 고경민 등이 함께 했다.

충경공 이정란은 전주성을 결사 사수하기 위해 거병한 뒤 정협과 윤계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김제군수 정담과 해미현감 변응정에 격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웅치대혈전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등도 참여했다.

표의장(彪義將)심우신은 24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에 임명돼 25세에 왕명으로 영광에 출장을 가다 그곳에서 만난 선무랑 임식의 딸 장흥 임씨와 혼인했다. 임식은 수천석의 부자로, 천여석을 거둘 수 있는 농토를 받기도 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처남 임두춘과 함께 정충훈, 김부행, 최인, 박언준, 김보원 등의 호응을 얻어 거병했다. 장인에게 받은 농토를 모두 처분, 병기와 군량을 마련한 뒤 왜적과 맞섰다.

고봉 기대승의 맏아들인 함재 기효증이 나주에 의곡청을 설치하자 영광 이굉중, 남평 송기원, 광주 이운홍 등이 모여 그를 의곡장(義穀將)으로 추대했다. 기효증이 모아 의주의 선조에게 헌납한 의곡 3200석 가운데 1200석은 이운홍, 이곤, 이분, 이용중, 오귀영, 이희룡, 송약선, 이헌, 임수춘, 이안현, 이의남 등 18인 의사가 모은 것이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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