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조롱과 선동의 배후 관계에 대하여
2021년 04월 12일(월) 00:00 가가
무차별한 조롱과 선동의 언어가 어지럽다. 이런 시절을 견뎌야 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조롱과 선동은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장 빠르고 쉽게 끌고 가려는 가장 저급한 수단이다. 하지만 조롱과 선동의 힘이 자체로부터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선동하기에 적합한 혼란과 방향 판단의 망설임이 있거나 할 때, 특히 조롱을 지적 능력의 탁월함으로 혼동하는 경우에 극대화된 힘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조롱의 전제 조건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호작용이다.
조롱을 일삼는 사람들은 자신을 계몽자라고 믿으며, 조롱은 조롱의 소비자에 대한 날카로운 계몽이라고 믿는다. 사람 대신 ‘막대기’를 꽂아도 통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판단과 선택의 능력을 애초에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미 상황은 기울어졌으니, 막대기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조롱의 늪에 빠지면 일과 사람 모두가 초라해진다. 이렇듯 조롱은 차가운 비웃음과 독한 부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선동의 심리는 더 위험하다. 특정한 대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배후에서 조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롱보다 선동은 훨씬 더 정치적인 수단이 되기 쉬우며 맹목적이고, 감정적이다. 선동에는 오직 흑백논리만 있고, 타인의 생각과 의식을 장악하려는 목적만 있다. 노인을 앞세워 앵벌이를 했다거나, 부모가 잘못하면 자식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선동의 영역이다. 잘못한 부모의 덕으로 자식이 특권을 누렸으니 벌을 주자는 의미다.
누군가의 흔들리는 심리에 파고드는 것이 선동의 치졸함과 무책임성이다. 이러한 선동의 생리는 상대방을 먼저 적으로 그리고 나서는 ‘악마화’로 나타나며, ‘우리’는 억울하게 최소한의 몫마저 뺏기고 있다고 호소함으로써 ‘편 만들기’를 하는 것이다. 이 ‘갈라치기 문법’의 전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는 국민을 유대인과 독일인으로 나눴던 독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소통의 수단임에 틀림없지만,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통과 이해 대신 교묘하게 왜곡과 조작을 하는 역기능도 있다. 언어의 이러한 이중적 기능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언어의 순기능보다는 파괴적 역할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월적 시선으로 마치 중대한 공익적 책무인 양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 집단을 독하게 모욕하고 비웃음거리로 삼는다.
사실 이런 일은 공익을 위한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자부심이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자부심과 이면의 숨겨진 욕망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충돌하는 것이다. 조롱과 선동의 언어는 얼핏 감춰진 사태를 사납지만 예리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차분하게 보면 거기에는 세상의 흐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욕망과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 여기에 조롱과 선동을 퍼 나르며 경쟁하듯 난장을 벌이는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합세한다. 이런 생산자와 언론매체의 유통구조를 통해서 가공된 현실과 사실들이 부지런히 만들어지고 배달된다.
중심을 향한 질주 욕망, 요즘 말로 ‘인싸’의 본질은 자신의 무력과 무능에 대한 은폐된 두려움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아싸’로 밀려나서, 관심 밖에서 기웃대는 일이 누군들 반갑겠는가.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마구잡이로 수단을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다행히 조롱과 선동이 주는 ‘사이다’의 맛은 몇 번은 시원할 수 있으나, 그 유통기간은 매우 짧다.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방식으로 조롱과 선동의 언어를 마구잡이로 상품화하는 탓이다. 신화 속의 강도는 행인들을 붙잡은 뒤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 늘여서 죽이고, 침대보다 크면 밖으로 나온 부분을 잘라서 죽였다. 자기의 기준을 절대 진리로 만드는 잔인한 침대에서는 누구라도 조롱과 선동적 악마화의 대상이 된다.
이 희망 없는 침대 대신에 잘못된 것과 어리석음에 우아하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생각해 볼 일이다. 브레히트의 시 한 구절이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이에 따르면 조롱과 선동이 자라는 토양은 곧 우리 자신이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소통의 수단임에 틀림없지만,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통과 이해 대신 교묘하게 왜곡과 조작을 하는 역기능도 있다. 언어의 이러한 이중적 기능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언어의 순기능보다는 파괴적 역할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월적 시선으로 마치 중대한 공익적 책무인 양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 집단을 독하게 모욕하고 비웃음거리로 삼는다.
사실 이런 일은 공익을 위한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자부심이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자부심과 이면의 숨겨진 욕망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충돌하는 것이다. 조롱과 선동의 언어는 얼핏 감춰진 사태를 사납지만 예리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차분하게 보면 거기에는 세상의 흐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욕망과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 여기에 조롱과 선동을 퍼 나르며 경쟁하듯 난장을 벌이는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합세한다. 이런 생산자와 언론매체의 유통구조를 통해서 가공된 현실과 사실들이 부지런히 만들어지고 배달된다.
중심을 향한 질주 욕망, 요즘 말로 ‘인싸’의 본질은 자신의 무력과 무능에 대한 은폐된 두려움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아싸’로 밀려나서, 관심 밖에서 기웃대는 일이 누군들 반갑겠는가.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마구잡이로 수단을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다행히 조롱과 선동이 주는 ‘사이다’의 맛은 몇 번은 시원할 수 있으나, 그 유통기간은 매우 짧다.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방식으로 조롱과 선동의 언어를 마구잡이로 상품화하는 탓이다. 신화 속의 강도는 행인들을 붙잡은 뒤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 늘여서 죽이고, 침대보다 크면 밖으로 나온 부분을 잘라서 죽였다. 자기의 기준을 절대 진리로 만드는 잔인한 침대에서는 누구라도 조롱과 선동적 악마화의 대상이 된다.
이 희망 없는 침대 대신에 잘못된 것과 어리석음에 우아하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생각해 볼 일이다. 브레히트의 시 한 구절이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이에 따르면 조롱과 선동이 자라는 토양은 곧 우리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