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세월 켜켜이 쌓인 남도의 한(恨)
2021년 03월 25일(목) 08:00 가가
박정희는 남조선노동당 소속이었다. 쉽게 말하면 공산당 당원이었다. 이로 인해 1948년 체포돼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박정희를 살려 준 이는 채병덕·백선엽·김창룡 등이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김창룡은 일본 헌병대를 나왔다. 이들은 박정희가 최소한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도 일제(日帝)가 세운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으니까.
그렇게 살아난 박정희는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 반공(反共)을 전면에 내세운다. 자신의 이념 성향에 대한 의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이는 쿠데타 직후 군부가 발표한 혁명공약의 제1항이다. 그 당시 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무조건 혁명공약을 외워야 했고, 외우지 못하면 체벌을 받아야 했다. 이때 ‘국시’(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이나 이념)가 뭔 뜻인지 알 길 없었던 어느 시골 학생의 ‘웃픈’ 일화도 전해진다. ‘반공으로 국수를 삶고’ 어쩌고 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엄청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우리는 그런 강요된 반공의 시대를 살았다. 시골 담벼락 같은 곳에는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같은 구호가 적혀 있던 시절이었다. ‘간첩 잡는 아빠 되고 신고하는 엄마 되자’라는 표어도 생각난다. 그땐 여기저기 산자락 커다란 바위에 붉은 페인트로 큼직하게 쓰인 ‘반공 방첩’이란 네 글자도 흔히 볼 수 있었다.
희생자 유족들 숨죽이고 살아와
뼛속 깊이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랐던 내가 잠시 어린 시절 풍경을 회상해 본 것은 최근 ‘여순사건’에 대해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지난해 10월이었던가, 생면부지의 어느 독자로부터 몇 권의 책과 함께 한 통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주필님의 글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로 시작한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할아버지께서 벙어리 70년 귀머거리 70년,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연좌제 빨갱이. 한이 켜켜이 쌓이고 쌓인 세월 이젠 훌훌 털고 생활하다 가고 싶습니다. 주필님. 잘못된 역사 바로잡아 주시길 빌고 빕니다.” 편지를 보내온 이는 보성 복내면에 사는 이찬식 씨라고 했다.
편지만으로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조부께서는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었다. 동봉된 책 중 하나는 ‘여순 10·19 72주년 추념 창작집’이었고 또 하나는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에서 발간한 잡지였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나 편지를 받은 이후 나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언젠가 시간 나면 한번 읽어 봐야겠다면서 밀쳐놓았다가 그만 책을 받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다 최근 여순사건특별법이 뉴스에 오르내리면서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난해 편지를 받았을 무렵, 소설가 백시종 씨가 여순사건을 소재로 쓴 장편소설(‘여수의 눈물’) 단행본을 내게 보내온 사실도 떠올랐다. 다행히 책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나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에 휩싸여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인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좌익 군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며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때만 해도 똑똑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물드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미군정이 1946년 8월에 8453명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7%나 됐다고 한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14연대의 출동 거부로 일어난 봉기군(과거에는 반란군이라 했다)과 진압군의 무력 충돌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해를 초래했다. 이들은 여수에서 일어나 순천까지 진격했지만 며칠 만에 토벌군이 순천을 탈환하면서 산(지리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빨치산’이 된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여순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이 우리 군경(軍警) 토벌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이라는 점이다. 1만5000명의 희생자 중 무려 1만2000명.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참히 학살당했다. 더욱이 그 가족들조차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으면서 70년 넘게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순사건 특별법' 이번에는 꼭
그날의 참혹했던 장면 중 특히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 학살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부상을 입고 산에서 내려온 열 네 살짜리 소년이 불쌍해서 상처를 소독해 주고 먹을거리도 주었다. 한데 아뿔싸. 이 소문을 들은 면서기가 토벌대에 신고를 해 버린 것이다. 토벌대 대위는 주민 50여 명을 집합시킨 뒤 그 자리에서 스물두 명의 마을 사람들을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데 이 같은 참혹한 현장은 신전마을뿐만이 아니었다. 여수·순천은 물론 구례·광양·보성 등 곳곳에서 이러한 처절한 비극이 잇따랐다. 나는 지금의 미얀마처럼 혹은 그때의 광주처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런 잔혹한 ‘야만의 시대’가 있었음을 알고 몸서리를 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날의 비극을 정부가 명명한 그대로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다 1995년에야 비로소 ‘여수·순천 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부르게 되며 ‘반란’이란 두 글자를 지울 수 있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을 반란의 주체로 오인할 소지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통한(痛恨)의 세월을 살아온 여순10·19 유족들. 그들에게 최근 그나마 한 줄기 작은 희망의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수 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그동안 16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여덟 차례나 발의된 특별법이 모두 무위(無爲)로 끝난 가운데, 이번 21대 국회에서 또다시 발의된 것이다.
‘여순 10·19’는 ‘제주 4·3’이나 ‘광주 5·18’과도 비슷한 역사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정통성을 상실한 부당한 국가의 폭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중 ‘광주 5월’과 ‘제주 4월’ 관련 법안은 모두 통과된 반면 ‘여순 10월’ 특별법만 아직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그러니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이번에야말로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한 여순사건 특별법을 꼭 통과시켜 주기를! 그동안 켜켜이 쌓인 그들의 ‘70년 한(恨)’, 이제 풀어 줄 때도 되지 않았는가.
/주필
뼛속 깊이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랐던 내가 잠시 어린 시절 풍경을 회상해 본 것은 최근 ‘여순사건’에 대해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지난해 10월이었던가, 생면부지의 어느 독자로부터 몇 권의 책과 함께 한 통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주필님의 글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로 시작한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할아버지께서 벙어리 70년 귀머거리 70년,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연좌제 빨갱이. 한이 켜켜이 쌓이고 쌓인 세월 이젠 훌훌 털고 생활하다 가고 싶습니다. 주필님. 잘못된 역사 바로잡아 주시길 빌고 빕니다.” 편지를 보내온 이는 보성 복내면에 사는 이찬식 씨라고 했다.
편지만으로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조부께서는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었다. 동봉된 책 중 하나는 ‘여순 10·19 72주년 추념 창작집’이었고 또 하나는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에서 발간한 잡지였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나 편지를 받은 이후 나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언젠가 시간 나면 한번 읽어 봐야겠다면서 밀쳐놓았다가 그만 책을 받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다 최근 여순사건특별법이 뉴스에 오르내리면서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난해 편지를 받았을 무렵, 소설가 백시종 씨가 여순사건을 소재로 쓴 장편소설(‘여수의 눈물’) 단행본을 내게 보내온 사실도 떠올랐다. 다행히 책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나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에 휩싸여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인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좌익 군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며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때만 해도 똑똑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물드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미군정이 1946년 8월에 8453명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7%나 됐다고 한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14연대의 출동 거부로 일어난 봉기군(과거에는 반란군이라 했다)과 진압군의 무력 충돌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해를 초래했다. 이들은 여수에서 일어나 순천까지 진격했지만 며칠 만에 토벌군이 순천을 탈환하면서 산(지리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빨치산’이 된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여순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이 우리 군경(軍警) 토벌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이라는 점이다. 1만5000명의 희생자 중 무려 1만2000명.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참히 학살당했다. 더욱이 그 가족들조차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으면서 70년 넘게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순사건 특별법' 이번에는 꼭
그날의 참혹했던 장면 중 특히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 학살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부상을 입고 산에서 내려온 열 네 살짜리 소년이 불쌍해서 상처를 소독해 주고 먹을거리도 주었다. 한데 아뿔싸. 이 소문을 들은 면서기가 토벌대에 신고를 해 버린 것이다. 토벌대 대위는 주민 50여 명을 집합시킨 뒤 그 자리에서 스물두 명의 마을 사람들을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데 이 같은 참혹한 현장은 신전마을뿐만이 아니었다. 여수·순천은 물론 구례·광양·보성 등 곳곳에서 이러한 처절한 비극이 잇따랐다. 나는 지금의 미얀마처럼 혹은 그때의 광주처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런 잔혹한 ‘야만의 시대’가 있었음을 알고 몸서리를 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날의 비극을 정부가 명명한 그대로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다 1995년에야 비로소 ‘여수·순천 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부르게 되며 ‘반란’이란 두 글자를 지울 수 있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을 반란의 주체로 오인할 소지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통한(痛恨)의 세월을 살아온 여순10·19 유족들. 그들에게 최근 그나마 한 줄기 작은 희망의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수 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그동안 16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여덟 차례나 발의된 특별법이 모두 무위(無爲)로 끝난 가운데, 이번 21대 국회에서 또다시 발의된 것이다.
‘여순 10·19’는 ‘제주 4·3’이나 ‘광주 5·18’과도 비슷한 역사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정통성을 상실한 부당한 국가의 폭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중 ‘광주 5월’과 ‘제주 4월’ 관련 법안은 모두 통과된 반면 ‘여순 10월’ 특별법만 아직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그러니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이번에야말로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한 여순사건 특별법을 꼭 통과시켜 주기를! 그동안 켜켜이 쌓인 그들의 ‘70년 한(恨)’, 이제 풀어 줄 때도 되지 않았는가.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