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용력과 통솔력으로 앞장서 왜적을 무찌르다
2021년 03월 19일(금) 09:00
新 호남 의병 이야기 <5> 난세의 영웅 임란 의병장들, 그들은 어떤 장수였나 ②

담양 추성관에 보관돼 있는 삽봉 김세근의 칼. 고경명 의병에 합류하기 전에 부인 한씨에게 건네며 “칼이 녹슬거나 변색되면 죽은 줄 알라”고 한 것이 유언이 됐다. 부인 한씨는 세근의 전사 소식을 듣고, 칼 보관함을 열어본 뒤 색이 변한 것을 보고 자결했다.

지장(智將)=해광 송제민, 습정 임환, 충민공 양산숙, 충경공 이정란, 죽천 범기생



보성군 득량면 삼거리 군두에 있는 최대성의 순절지 비석. 최대성은 자신의 아들, 노비까지 함께 이순신의 해군에 합류해 전공을 세운 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거병해 보성으로 쳐들어온 왜적을 막아냈다. 그는 후퇴하는 왜적을 추적하다 복병을 만나 조총을 맞고 전사했다.
해광 송제민은 도량이 크고, 학문에 심취해 토정 이정암, 중봉 조헌 등과 함께 ‘세한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조정에 개혁시책을 건의했다.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종군했으며, 조헌과 김천일이 전사하자 ‘와신기(와신상담에서 나온 말로 장작 위에서 자며 복수를 다짐한다는 의미)’라는 책을 쓸 정도로 복수감에 불탔다. 김덕령의 거병을 권유하고, 제주까지 찾아가 말 30필을 구해주는 등 거병을 북돋웠다. 만언소(1만자로 쓴 상소)를 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명한 문장가 임제의 동생인 습정 임환 역시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서울을 공략하는데 야간기습 전술을 건의했다. 김천일의 명으로 서울, 경기의 지도를 제작했으며, 몸에 병 얻어 나주에 귀향한 뒤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초의군을 이끌었다. 충민공 양산숙은 100여리 떨어져 거주하는 어머니를 매일 말을 타고 새벽 문안 인사를 할 정도로 효자였으며, 이를 통해 말과 자신을 단련시켰다. 왜구 대책에 고심하던 선조가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자 도끼를 등에 멘 채 반대 상소를 올려 이름을 알렸다. 김천일 의병에 종사하면서 국토수복계획과 부흥책을 직접 선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강화도에 진을 치고 있을 당시 서울에 잠입해 왕실 묘를 파헤치려는 왜적 앞잡이를 붙잡아 오기도 했다.

충경공 이정란은 60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전주로 귀향했으나 2개월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어 있던 전주성의 수성에 나섰다. 낮에는 깃발로, 밤에는 횃불로 군사 수를 부풀려 왜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자신 역시 군복을 한 번도 안 벗을 정도로 성심을 다했다. 군량과 병기를 조달하는데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의병에 참여했으며, 병사 수를 과장하기 위해 전주천을 일부러 더럽게 하는 등의 계책도 빛을 발했다.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썼던 계책 중에 하나인 ‘공성계’, 즉 전주성의 문을 모두 열게 한 뒤 노인에게 물을 뿌리게 하는 등 허세를 부려 위기에서 벗어났다.

죽천 범기생은 7살에 역사서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흉년이 계속되자 기아에 허덕이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곳간 열었다. 국난이 일어날 것을 예측해 말 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익혔으며, 김천일 의병에 합류해 기율을 세우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일을 맡았다. 김천일도 지휘 능력에 탄복했다고 전해지며, 북진하는 도중 한양 내부 동정을 살피기 위해 단신으로 4대문 안의 왜적 본진을 둘러보고 돌아올 정도로 배포도 컸다.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에 있는 충절사. 최대성과 그의 아들 언립, 후립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750년에 안방준 등 사림들의 상소로 정충사 건립의 윤허를 얻었으나 정충문 사적비만을 순절지인 군두에 세웠다가 1992년 사당을 건립해 해마다 부자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경내에는 사당인 충절사와 모의재, 기경관, 정려각, 정충문 등이 있다.
용장(勇將)=최경회·강희보·강희열·김덕령·최시망·왕득인·최대성·최욱·나덕명·김세근·심우신·유팽로·양대박·홍민언·홍민성·장윤



충의공 최경회는 찰과 칼이 무뎌질 때까지 싸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1592년 9월 무주대첩에서 왜장을 붙잡아 고려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와 왜장의 12척 언월도(화순 최씨 종가 보존)를 수거하기도 했다. 그는 고봉 기대승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며 36살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으며, 형인 경운·경장을 비롯해 아들과 조카 등 한 가문에서 모두 6명이 과거 합격해 명성이 높았다. 60세에 임란이 발발하자 탁월한 용병으로 병사들의 신망을 받았다. 1592년 8월 20일 짚다발을 안고 진격해 조총 피해 없이 금산성을 나간 왜적들을 쫓아 큰 공을 세웠다. 명장으로 소문이 나면서 의병 수가 1만 여명으로 늘어났으며, 들판에서는 학이 날개를 펴듯 진을 펼치고, 골짜기에서는 뱀이나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꾸는 등 진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궁이 수 늘려가며 군사 수를 위장하는 등 지략도 뛰어났다.

형제의병장 강희보·강희열은 각각 활과 칼을 잘썼다. 강희보는 고향에서 제자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강희열은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강희보는 경남 산청의 단성 전투에서 50대1의 싸움을 이겨 곽재우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경상도 의병장 김면의 휘하에서 표의병부장(표범처럼 날쌔다는 의미)이라고 불렸으며, 김면이 사망하자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이 때 구례 석주관을 지키던 강희열도 진주성으로 향했으며, 여기서 희보는 조총에, 희열은 백병전 끝에 전사했다.

충장공 김덕령은 지혜와 용기를 한 몸에 지녀 신장(神將)이라 불렸다. 어릴 때는 처마끝에 뛰어올라 새를 잡기도 했고, 누나와 내기를 해 50여 m 성을 홀로 축성하는 등 힘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무예를 익힌 무등산은 온통 그의 신화로 가득하다. 치마바위는 덕령의 누나가 이를 치마 폭에 앉아 올렸다고 해서 이름을 얻었으며, 주검동은 그가 100여 일간 노력해 직접 자신의 칼을 제작한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이경린 담양부사, 이귀 장성현감, 이정암 전라감사 등이 덕령을 천거하면서 “포승을 풀고 용호를 쫓으며 공중을 나는 용력을 가졌고, 지혜는 제갈공명보다 낫고 용맹은 광우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했다. 군영에 뛰어든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고, 광해군이 전주에서 덕령의 무예 시범를 본 뒤 “무예가 항우, 조자룡보다 낫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괴정 최시망은 김제군수로 있다가 임란이 발발하자 3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올라가다 거병했다. 엄한 군법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했으며,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여원치에서 왜적을 만나 208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올렸다. 왕득인은 임란 전부터 의협심이 강해 곳간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신망이 높았으며, 1593년 6월 곽영 장군을 도와 구례 석주관을 지켜냈다. 이후 400여 명의 의병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왜적 2000여 명과 백병전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모의장 최대성은 활솜씨가 뛰어나 200보 밖 15개의 화살을 모두 적중시켜 명성이 자자했다. 노송이 정자 지붕 덮치자 10여 명이 쩔쩔매며 옮기는 던 것을 혼자서 치울 정도로 힘도 장사였다. 33세에 무과에 급제해 40세에 정3품까지 올랐으며,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에서 후군장으로 활약했다. 큰아들 언립, 셋째 아들 후립, 노비 두리동, 갑술형제 등과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등에서 왜적 함선 26척과 11척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거병해 보성, 고흥, 벌교, 목포, 광양 등의 해안가로 접근하는 왜적을 물리쳤다.

열사 최욱은 김천일의 격문에 임신 8개월 부인과 딸을 흑산도로 피난시킨 뒤 나주에서 거병했으며, 월송리에서 도리깨로 왜적 50명을 사살하고, 10여 척 선박을 불태우는 전공을 올렸다. 나덕명은 정여립의 난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함경북도 경성으로 귀양갔다가 의병에 참여했다. 원충서, 한인제 등과 함께 왜적을 기습해 왜적 800여 명의 머리를 벴으며, 함경남도 마천령 밑 영동관 책성에서도 왜적 1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남겼다. 삽봉 김세근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해 35세에 종6품까지 올랐다가 38세에 귀향했다. 이후 광주 백마산 골짜기에 교련소를 짓고 무술을 익혔다. 거병하면서 부인 한씨에게 칼을 주고 가며, “칼이 녹슬거나 변색되면 죽은 줄 알라”고 맡겼다. 고경명 의병에 가담해 금산성을 공격하며 특공대를 이끌다 전사했다. 이 소식 들은 한씨 부인은 이미 색이 변한 칼을 보고 자결했다.

표의장 심우신은 건장한 체구에 용력이 비범했으며, 신궁으로 유명했다. 당시 명장으로 알려진 신립 장군이 무인이 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해 한양에서 철수하는 왜적을 쫓았으며,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동문 수비 맡아 불화살로 왜적을 공격했다. 월파 유팽로는 학문과 무예 단련에 힘썼으며, 특히 말타는 솜씨 탁월해 김덕령과 비견되기도 했다. 25세에 문과 급제한 뒤 임란이 발발하자 귀향하는 길에 공주에서 다리 5개를 가진 말 주인을 만났다. 사나운 말이 다소곳해지자 말 주인이 팽로에게 말을 건넸으며, 팽로가 칼로 다리 하나를 잘랐는데, 이후 천리마가 됐다. 청색기를 들고 40여 명의 특공대를 구성해 임실 등에서 왜적을 무찔렀고 이후 고경명 의병에 합류했다가 29세에 전사했다. 팽로의 말이 전사한 팽로의 머리를 물고 부인 김씨가 있는 집에 찾아갔으며, 김씨가 치마로 팽로의 머리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말도 곧바로 숨졌으며, 부인 역시 삼년상 후 순절했다.

충장공 양대박은 병법과 진법을 연구하며 임란을 이미 예측했다. 홍색기를 들고 거병해 전북 임실군 운암면에서 왜적을 만나 홀로 5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여명의 적을 궤멸시켰다. 참수 1207급, 전마 95필, 대소총 79정 등의 전공이 기록돼 있다. 그가 흑마를 타고 장검을 휘두르는 그림이 ‘운암파왜도’다. 홍민언·홍민성 형제는 남원 이백면과 운봉면 사이 고개에서 진주성으로 가던 왜적과 조우해 208명을 참살했으며, 남평 드들강으로 건너오는 왜적 역시 화살로 300여 명을 사살했다.

충의공 장윤은 선전관 장응익의 아들로, 8척 장신에 지략과 용력을 갖췄다. 순천 수성장으로 있다가 300여 명 이끌고 임계영의 의병에 합류했으며, 말을 타고 적의 수급을 낙엽처럼 베는 등 성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400여 명의 백성을 구해냈다. 임계영으로부터 300여 명의 의병을 건네받아 진주성에 입성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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