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으로 장병 이끈 ‘덕장’…지혜로 작전 펼친 ‘지장’
2021년 03월 05일(금) 10:00 가가
新 호남 의병이야기 <4> 난세의 영웅 임란 의병장들, 그들은 어떤 장수였나 ①


장성군 북이면 옛 사거리에 있는 오산남문창의비와 비각. 1802년 비를, 1809년 비각을 각각 설립했다. 비석 앞면에는 의병을 주도적으로 이끈 오천 김경수 등 22명과 이들의 형제, 아들 등 12명 등 의병 참가자 76명의 직위와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임진왜란 의병장 34명의 대부분은 벼슬길에 올랐다가 낙향했거나 당쟁이나 집안 형편, 글공부에 대한 애착 등으로 출사를 포기한 양반이었다. 의병장은 기본적으로 죽음을 무릅쓰며 왜적과 맞서고, 민심을 얻어 수천, 수만의 사람을 모았으며, 적은 군사와 미흡한 무기로 싸워 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의 역사를 남겼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용기, 덕, 지혜를 겸비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의병열전에서 다룬 25편 34명의 임란 의병장들의 특징을 보다 부각시켜 그들의 공적을 살펴보기 위해 덕으로 휘하 장병들을 이끌며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한 덕장, 다양한 지혜와 계략을 통해 신출귀몰한 작전을 펼친 지장, 남다른 용력과 통솔력으로 앞장서 왜적을 무찌른 용장 등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해봤다.
덕장(德將)-제봉 고경명, 오천 김경수, 함재 기효증
대표적인 덕장으로는 제봉 고경명이 있다. 그는 호남에서 명망 있는 선비였고,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26세의 나이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가 홍문관 교리에서 울산군수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귀향했다. 18년간 광산 대촌에 묻혀 살다가 1581년 영암군수로 재기용된 후 율곡 이이의 종사관, 예조정랑을 거쳐 58세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천문에 밝아 1592년 3월(음력) 이미 재난을 예언했고,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책을 덮고 칼자루를 쥘 때”라며 담양 추성관에서 아들 종후, 인후 등과 거병했다. 의병을 데리고 북진하며 말 위에서 쓴 격문이 유명한데, 여기서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낱 선비 늦게 나마 단심(충성심)과 절개 하나로 일어섰는데 마치 격류 가운데 떠가는 배마냥 외로운 충성이로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고경명과 그 둘째아들 인후는 금산성 전투에서, 그 후 복수군을 편성한 큰아들 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머슴이었던 봉이와 귀인도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면서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다.
오천 김경수는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 후학들에도 깍듯이 예를 갖추고 존중했다. 벼슬길에 나서기보다 학문 정진을 선택한 후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제자들에게는 “조심은 복의 근원이요, 경솔은 화의 문”이라고 하는 등 처세 요령 20가지를 가르쳤다. 임란이 닥치자 고경명에게 쌀과 화살 등 물자를 지원하고, 고경명이 전사하자 1592년 11월 17일 자신이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다만 의병장에는 전투 경험이 있는 오봉 김제민을 추대하고 본인은 뒤에서 묵묵히 도왔다. 도체찰사인 송강 정철에게 양반이나 천민 가릴 것 없이 왜적과 싸워 이기면 공을 인정해주고, 조세 감면, 공물 탕감, 관리들에 대한 맛있는 음식 금지 등 10가지 직언을 올린 것도 유명하다. 아들 극후와 극순이 고종후와 함께 진주성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내 비록 너희들이 살아오기를 바랐으나 할 일을 다하고 죽었으니 젊음이 아깝지 않다”는 내용의 한시를 남겼다.
함재 기효증은 호남의 대학자 기대승의 맏아들이다. 31세에 과거 급제를 했으며, 41세 되던 해 왜적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나주에 의곡청 설치해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들에게 의곡을 전달하는 한편 의주행재소에 있는 선조에게 헌납할 곡식과 근왕병을 모았다. 이굉중 등 18명의 의로운 선비들이 1200석의 곡식을 모으는 등 기효증의 이름 석자에 각지에서 곡식이 당도해 1592년 11월 1일 수 백척의 선박에 싣고 근왕병 400여 병과 군산을 출발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풍랑 만나자 선박들을 묶어 돌파하고, 평안도에서는 주민들이 탄 피난선 10여 척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사를 올려주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뱃길 2000리길을 달려 3개월만인 1593년 2월 1일 선조가 있는 의주에 도착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조정에 헌납한 의곡 3200석, 콩 50석, 조 50석 등이고, 근왕병 460명도 함께 였다. 감격한 선조가 벼슬 내렸으나 사양하고 귀향했다.
지장(智將)-문열공 김천일, 오봉 정사제, 도탄 변사정, 삼도 임계영, 퇴은당 염걸
문열공 김천일의 전라우도의병은 ‘철모부대’로 유명했다. 부인이 박농사 풍년으로 옻칠을 한 박을 창고에 보관하다 남편이 의병을 일으키자 의병들의 머리 보호를 위해 쓰도록 했다. 그런데 김천일은 실제 검정색 철모를 제작하도록 한 뒤 왜적과 전투를 벌이면 무거운 철모를 전장에 남겨두게 했다. 왜적들은 김천일의 의병들이 힘이 남다른 장사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용의주도한 전략으로 경기도 용인에서는 패퇴한 관군을 대신해 싸워 설욕하고 1593년 4월 18일 왜적에게 함락된 한양에 최초로 입성하기도 했다. 진주성에 입성한 뒤 1593년 6월 21일 포위한 왜적이 토산을 쌓아올리자 대포로 허물고, 거북선을 본 떠 구갑군을 조직해 쳐들어오자 횃불로 태워버리는 등 지혜로웠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의 김천일에 대해 위험을 알고도 진주성에 입성하고, 그 자리를 지키며, 피신 권유에도 죽음을 선택하는 등 어려운 일 세 가지를 실천에 옮겼다고 그의 책(백사집)에 적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위대한 인품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운 오봉 정사제는 임란 발발 4개월 전인 1591년 12월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스스로 육도삼략을 공부했다. 스승인 박광전, 임계영, 문위세 등과 함께 거병하고, 대장 임계영을 대신해 상소문 ‘진창의토벌사소’를 지어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 직접 전했다.
삼도 임계영은 11살에 옥편을 외우고,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마을주민들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3개의 섬을 조성했다. 그 3개의 섬을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손오병법 등의 병법서를 읽고 전술과 전법을 익혀 전투에 적용했다. 당시로서는 고령인 64세의 나이로 거병하며 연륜도 갖췄으며, 주로 매복해 적을 섬멸했다. 호랑이 그림을 깃발에 그리는 등 용맹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1593년 정월 대보름날 경북 성주성을 탈환하고, 1594년 2월 섬진강변에서 대승을 거뒀다.
7살에 부모를 모두 여읜 도탄 변사정은 사서삼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을 두 형과 함께 배웠는데, 언제나 형들을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이항의 문하에서 기대승, 김천일, 기효련, 박광옥, 정엽, 양대복, 하맹보, 김점 등과 사귀고, 변란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채 1584년부터 제자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자신도 58세의 나이에 활쏘기, 말타기 등에 정진했다. 거병해 충북 옥천에서 왜적 1000여 명을 시살하고 병참노선을 교란시키는 등 공을 세웠다. 권율과 수원 독성산성에 입성한 후 포위한 왜적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는 세남천의 물길을 막아버리자 왜적들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흰쌀로 말을 씻겨 물이 넉넉한 것처럼 위장했다. 왜적은 이에 속아 막았던 물길을 다시 텄으며, 말을 흰쌀로 씻겼던 서장대는 이후 세마대로 불렸다.
퇴은당 염걸은 4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을만큼 총명했다. 10살 때는 강도질하는 5~6명의 등에 먹칠을 해 둬 다음날 찾아내 벌을 줬다. 1564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100여 명을 모아 왜구들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진법을 익혀 임란이 발발하자 왜적들이 상륙할만한 곳에 허수아비를 세우는 위장전술을 폈다. 쟁기의 날을 화살촉으로 쓸만큼 힘도 세고 전략도 뛰어나 왜적들이 피해 다녔다고 한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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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북이면 옛 사거리에 있는 오산남문창의비와 비각. 1802년 비를, 1809년 비각을 각각 설립했다. 비석 앞면에는 의병을 주도적으로 이끈 오천 김경수 등 22명과 이들의 형제, 아들 등 12명 등 의병 참가자 76명의 직위와 이름이 새겨져 있다. |
함재 기효증은 호남의 대학자 기대승의 맏아들이다. 31세에 과거 급제를 했으며, 41세 되던 해 왜적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나주에 의곡청 설치해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들에게 의곡을 전달하는 한편 의주행재소에 있는 선조에게 헌납할 곡식과 근왕병을 모았다. 이굉중 등 18명의 의로운 선비들이 1200석의 곡식을 모으는 등 기효증의 이름 석자에 각지에서 곡식이 당도해 1592년 11월 1일 수 백척의 선박에 싣고 근왕병 400여 병과 군산을 출발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풍랑 만나자 선박들을 묶어 돌파하고, 평안도에서는 주민들이 탄 피난선 10여 척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사를 올려주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뱃길 2000리길을 달려 3개월만인 1593년 2월 1일 선조가 있는 의주에 도착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조정에 헌납한 의곡 3200석, 콩 50석, 조 50석 등이고, 근왕병 460명도 함께 였다. 감격한 선조가 벼슬 내렸으나 사양하고 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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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앞선 오산남문창의비의 선열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 지은 ‘오산창의사’. |
문열공 김천일의 전라우도의병은 ‘철모부대’로 유명했다. 부인이 박농사 풍년으로 옻칠을 한 박을 창고에 보관하다 남편이 의병을 일으키자 의병들의 머리 보호를 위해 쓰도록 했다. 그런데 김천일은 실제 검정색 철모를 제작하도록 한 뒤 왜적과 전투를 벌이면 무거운 철모를 전장에 남겨두게 했다. 왜적들은 김천일의 의병들이 힘이 남다른 장사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용의주도한 전략으로 경기도 용인에서는 패퇴한 관군을 대신해 싸워 설욕하고 1593년 4월 18일 왜적에게 함락된 한양에 최초로 입성하기도 했다. 진주성에 입성한 뒤 1593년 6월 21일 포위한 왜적이 토산을 쌓아올리자 대포로 허물고, 거북선을 본 떠 구갑군을 조직해 쳐들어오자 횃불로 태워버리는 등 지혜로웠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의 김천일에 대해 위험을 알고도 진주성에 입성하고, 그 자리를 지키며, 피신 권유에도 죽음을 선택하는 등 어려운 일 세 가지를 실천에 옮겼다고 그의 책(백사집)에 적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위대한 인품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운 오봉 정사제는 임란 발발 4개월 전인 1591년 12월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스스로 육도삼략을 공부했다. 스승인 박광전, 임계영, 문위세 등과 함께 거병하고, 대장 임계영을 대신해 상소문 ‘진창의토벌사소’를 지어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 직접 전했다.
삼도 임계영은 11살에 옥편을 외우고,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마을주민들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3개의 섬을 조성했다. 그 3개의 섬을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손오병법 등의 병법서를 읽고 전술과 전법을 익혀 전투에 적용했다. 당시로서는 고령인 64세의 나이로 거병하며 연륜도 갖췄으며, 주로 매복해 적을 섬멸했다. 호랑이 그림을 깃발에 그리는 등 용맹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1593년 정월 대보름날 경북 성주성을 탈환하고, 1594년 2월 섬진강변에서 대승을 거뒀다.
7살에 부모를 모두 여읜 도탄 변사정은 사서삼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을 두 형과 함께 배웠는데, 언제나 형들을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이항의 문하에서 기대승, 김천일, 기효련, 박광옥, 정엽, 양대복, 하맹보, 김점 등과 사귀고, 변란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채 1584년부터 제자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자신도 58세의 나이에 활쏘기, 말타기 등에 정진했다. 거병해 충북 옥천에서 왜적 1000여 명을 시살하고 병참노선을 교란시키는 등 공을 세웠다. 권율과 수원 독성산성에 입성한 후 포위한 왜적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는 세남천의 물길을 막아버리자 왜적들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흰쌀로 말을 씻겨 물이 넉넉한 것처럼 위장했다. 왜적은 이에 속아 막았던 물길을 다시 텄으며, 말을 흰쌀로 씻겼던 서장대는 이후 세마대로 불렸다.
퇴은당 염걸은 4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을만큼 총명했다. 10살 때는 강도질하는 5~6명의 등에 먹칠을 해 둬 다음날 찾아내 벌을 줬다. 1564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100여 명을 모아 왜구들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진법을 익혀 임란이 발발하자 왜적들이 상륙할만한 곳에 허수아비를 세우는 위장전술을 폈다. 쟁기의 날을 화살촉으로 쓸만큼 힘도 세고 전략도 뛰어나 왜적들이 피해 다녔다고 한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