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독충정’ 임란 의병장 고경명, 두 아들 고종후·고인후와 왜적에 맞서다
2021년 01월 29일(금) 10:00
新 호남 의병 이야기 <2> 임란 의병장, 그들의 거병과 최후
전남 첫 의병장 김천일, 진주성 지켜
전라우도의병장 최경회, 1만병력 이끌어
형제병장 강희보·강희열, 진주성 합류
정사제, 보성에 의병청 설치 의병 모아
김덕령, 이순신과 수륙연합작전 논의

임진왜란 당시 나주 의병장인 최오는 백련산에서 가솔과 지방민를 이끌고 최후까지 선전하다가 장렬히 숨졌다. 그는 동강면 월송리에서 태어났다.

광주일보의 의병열전(1975.12.1~1977.7.21)은 모두 49편 439회다. 임진왜란 의병장 25편, 병자호란 의병장 9편, 한말 의병장 15편이다. 1편당 적게는 3회, 많게는 20회 넘게 의병장을 집중해 다뤘다. 46년이 지나 2021년 새롭게 시작하는 신 의병열전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주제별로 엮어 새로운 시각에서 재편성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을 연재한 조동수 전 광주일보 주필(왼쪽)과 김동영 기자(전 로케트전기 대표이사)가 나주 일대 의병 전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이들은 1년 8개월간 현장 취재, 자료 수집 등을 통해 대하기획 ‘의병열전’ 49편 439회를 연재,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을 침략하면서 시작돼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6년 7개월여 간의 전쟁이었다.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패하면서 한양, 평양 등이 함락되자 비교적 피해를 덜 입은 전남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거병하며, 후방에서 왜적들을 괴롭혔다. 조선시대의 중심계층인 양반이 주로 앞장서 ‘근왕척왜’를 명분으로 삼았다.

‘의병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룬 의병장은 충렬공 고경명(59세에 사망)이었다. 26세에 장원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 영암군수 등을 역임한 그는 광주 광산 대촌 출신으로, 임란이 발발한 지 40여 일이 지난 1592년 5월 29일(음력) 담양 추성관에서 거병했다. 유팽로, 안영, 양대박, 최상중, 양사위, 양회적, 박광옥 등 지역 명사들이 참여해 한 때 의병 수가 8000명에 이르렀으며, ‘전라좌도의병대장’을 맡았다.

북진하던 그는 7월 9일 충남 금산에서 왜적과 대치하다 7월 10일 제1차 금산성전투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 인후(32)도 함께 했으며,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전장에 벗어났던 첫째 아들 종후(39)는 같은 해 12월 ‘복수군’을 조직해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3부자가 모두 왜적과 맞서다 숨진 것이다. 그의 좌우명 ‘세독충정(世篤忠貞, 대대로 독실히 충정을 다한다)’대로 살다 간 것이다. 북진하며 말 위에서 의병 거병을 독려하는 글 ‘마상격문’을 썼고, 관군이 후퇴한 뒤에도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전남에서 가장 먼저 거병한 의병장은 문열공 김천일(56)이었다. 1573년 추천으로 출사해 임실현감, 수원부사 등을 지냈으며, 나주 출신이다. 1592년 5월 16일 송제민, 양산용, 양산숙, 서정후, 임환, 이광우 등이 참여해 300여 명으로 출발한 의병 수는 북진하면서 5000여 명까지 급증했다. 충남 강경 첫 전투, 수원 독산산성 전투 등에서 승리한 뒤 강화도에 들어가 호남, 영남 등과 선조가 있는 의주행재소 간 통로를 만들었다. 1593년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의 7차례의 공략을 막아서며 분전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진주성을 호남의 관문으로 여긴 김천일은 의병장 곽재우, 명나라군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에 입성했으며, “내 고장,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힘뿐이다.”라며 주위를 격려했다.

논개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충의공 최경회(61)는 화순 출신이다. 36세에 과거 급제, 46세 장수현감을 지냈으며, 58세에 16세의 논개를 부실(첩)로 들였다. 1592년 7월 환갑의 나이에 사위 문홍헌의 권유로 거병, 송대창, 고득뇌, 허일, 권극평 등 인사들이 참여했다. 자신의 아들인 홍기, 홍적, 큰 형 경운의 아들 홍재, 둘째 형 경장의 아들 홍우 등도 함께 했다. 전라우도의병장으로 불렸으며, 병력은 1만여명에 달했다. 남원, 전주, 무주, 진안을 거쳐 경북 성주성 싸움에서 크게 활약한 뒤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1593년 6월 29일 밤 동쪽 성문이 무너지면서 왜적이 몰려들자 피신을 권유하는 부하에게 “성이 있으면 내가 있고 성이 없으면 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김천일, 고종후 등과 남강에 투신해 숨졌다. 이 사실을 안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7월 7일 승전축하연 자리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바위로 유인해 함께 투신해 최경회의 뒤를 따랐다. 65세의 최경장이 숨진 동생 유품을 들고 1593년 8월 거병하기도 했다.

광양 출신의 강희보(32)·강희열(31)은 형제의병장으로, 이들은 거병한 뒤 각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뒤 진주성에 합류해 제2차 전주성전투에 나서 “진주가 깨지면 우리의 고향 전라도가 위험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곳을 사수함이 내 집, 내 고장을 지키는 것이다”며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 산화했다.

오봉 정사제(38)는 보성 출신으로, 1592년 9월 초 보성읍에 의병청을 설치해 의병을 모았다. 안방준, 스승 박광전의 아들 박근효, 문위세, 염세응, 염세경, 이충량, 김홍업, 선경용, 김언립, 백민수, 황윤기, 임영개 등 지역 인사와 원개·영개·형개·홍개 등 자신의 네 아들, 조카 희개 등이 참여했다. 임계영을 대장으로 하고 종사관이 된 정사제는 여러 전투를 거쳐 의병의 연합작전이 시급하다고 여기고, 경북 성주에서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직접 찾아가 상소문 ‘진창의토벌사소’를 바쳤다. 1594년 5월 9일 남원의 왜적을 공격하다 “왜적의 침입에 분하고 원통해 부모님 무덤을 눈물로 하직하고 창칼을 들어 의병을 일으켰네. 사람으로 태어나 하고자한 충효를 다하지 못한 채 이제 죽음의 길에 이르니 한만이 서리는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전사했다.

충장공 김덕령(29)은 광주 동구 충효동 출신으로, 익호장군, 초승장군, 충용장 등 세 가지 호칭으로 불렸다. 그만큼 조정과 백성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1592년 5월 고경명이 거병할 때 참여했으나 병환중인 어머니를 돌보라는 현 김덕홍의 권유로 도중에 귀향했으며, 7월 형 김덕홍이 전사하고 병석의 어머니 역시 1년이 채 안 돼 사망했다. 1593년 12월 삼년상을 지내는 도중 김응회, 송제민, 이인경 등의 권유로 거병했다. 최담령을 부장으로 삼아 곽재우와 함께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나, 명나라와 왜적의 강화회담으로 인해 큰 전투에 나설 수 없었다.

1594년 9월 권율,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4명의 임란 영웅이 모여 수륙연합작전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주변의 질투와 모함에 따른 탄핵으로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에 연루돼 심한 문초 속에 1596년 8월 21일 옥에서 절명했다.

무안군과 나주군의 경계인 몽탄대교. 임진왜란 당시 최오는 이곳에서 의병을 모았고, 나덕명은 강변에 있는 적벽 위에 정자를 짓고 말년을 보냈다.
최욱(43)은 나주 출신으로, 1597년 8월 300여 명의 장정을 모아 나주로 들어오는 왜적과 맞섰다. 백련산, 영산강 등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9월 영암의 의병장 김덕흡의 지원 요청으로 출병했다가 백련산으로 돌아오는 도중 왜적을 만나 전사했다. 나덕명(59) 역시 나주 출신으로, 38세에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경북도 경성으로 귀양갔다가 3년만인 41세에 임란이 발발했다. 광해군이 근왕병을 모집하자 참여해 함경북도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남 서천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1596년 귀양이 풀려 귀향한 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임환과 함께 거병해 화순 동복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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